그만 집에 가자
정대호
귀향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2차 대전의 막바지
집으로 갈 수 없는 영혼들인
두 소녀가 위안소에서 나누는 이야기
언니,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전쟁이 끝나고
위안소에서 나와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할 때
일본군의 총에 맞아 언니가 죽는 순간
동생이 언니를 보듬어 안고 다시 하는 이 말
언니,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언니가 동생에게
먼저 가
내 뒤 따라 갈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혼들이 나누는
이 다정한 이야기
아! 나는 참으로 행복했어라
1960년대 말
어느 따뜻한 봄날 툇마루에 앉아
보리밭 매던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기우는 해를 따라 내 발길이 어느새
어머니의 일터 밭머리에 다가갔을 때
한 호미만 더, 한 호미만 더, 밭 매던
어머니가 미안하여 얼른 밭머리로 나오며
어머니, 머릿수건을 벗어 치마의 흙먼지를 털며
배고픈 아들의 손을 잡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밥해 묵자
부엌에 불 때어 따순 밥 지어
밥카 장카 비벼서
호롱불 아래 머리 맞대고 먹었지.
뙤약볕이 쪼이는 여름날
고추 밭 매는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기우는 해를 따라
내 발길이 어느새 밭머리에 다가갔을 때
어머니, 머릿수건을 벗어 이마의 땀을 닦고
치마의 흙먼지를 털며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밥해 묵자
상추 배추 뽑아서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지.
귀향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그 서글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혼들이 나누는
언니,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이 말을 곱씹으며
내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이 말이
흐릿한 장면으로 머릿속에 그려져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어머니와 둘이서 술 한 잔 나누며
추억으로 나누고 싶은 이 말
내 어린 날의 따뜻했던 씁쓸한 행복함이여.
<정대호 시인, 문학평론가>
1958년 청송군 진보면 부곡리 출생
부곡초등학교 18회, 진성중학교 8회 졸업
대건고등학교 26회 졸업
경북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4년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
시집 : 다시 봄을 위하여(1985년)
겨울 산을 오르며(1994년)
지상의 아름다운 사랑(2000년)
어둠의 축복(2008년)
마네킹도 옷을 갈아입는다(2016년)
가끔은 길이 없어도 가야 할 때가 있다(2020년)
평론집 : 작가의식과 현실(1997년)
세계화 시대의 지역문학(2002년)
현실의 눈, 작가의 눈(2004년)
산문집 : 원이의 하루(2015년)
계간 ‘사람의 문학’ 발행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광역시 지회장 역임
대구 이육사기념사업회 상임 대표 역임
10월 문학제 위원장
사단법인 10월 항쟁 유족회 한국전쟁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