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 - 그만 집에 가자 (정대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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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시 - 그만 집에 가자 (정대호 시인)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3.03.2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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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집에 가자

 

       정대호

 

 

귀향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2차 대전의 막바지

집으로 갈 수 없는 영혼들인

두 소녀가 위안소에서 나누는 이야기

언니,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전쟁이 끝나고

위안소에서 나와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할 때

일본군의 총에 맞아 언니가 죽는 순간

동생이 언니를 보듬어 안고 다시 하는 이 말

언니,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언니가 동생에게

먼저 가

내 뒤 따라 갈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혼들이 나누는

이 다정한 이야기

 

아! 나는 참으로 행복했어라

1960년대 말

어느 따뜻한 봄날 툇마루에 앉아

보리밭 매던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기우는 해를 따라 내 발길이 어느새

어머니의 일터 밭머리에 다가갔을 때

한 호미만 더, 한 호미만 더, 밭 매던

어머니가 미안하여 얼른 밭머리로 나오며

어머니, 머릿수건을 벗어 치마의 흙먼지를 털며

배고픈 아들의 손을 잡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밥해 묵자

부엌에 불 때어 따순 밥 지어

밥카 장카 비벼서

호롱불 아래 머리 맞대고 먹었지.

 

뙤약볕이 쪼이는 여름날

고추 밭 매는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기우는 해를 따라

내 발길이 어느새 밭머리에 다가갔을 때

어머니, 머릿수건을 벗어 이마의 땀을 닦고

치마의 흙먼지를 털며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밥해 묵자

상추 배추 뽑아서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지.

 

귀향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그 서글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혼들이 나누는

언니,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이 말을 곱씹으며

내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이 말이

흐릿한 장면으로 머릿속에 그려져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어머니와 둘이서 술 한 잔 나누며

추억으로 나누고 싶은 이 말

내 어린 날의 따뜻했던 씁쓸한 행복함이여.

 

 

정대호 시인, 문학평론가

 

<정대호 시인, 문학평론가>

1958년 청송군 진보면 부곡리 출생

부곡초등학교 18회, 진성중학교 8회 졸업

대건고등학교 26회 졸업

경북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4년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

시집 : 다시 봄을 위하여(1985년)

        겨울 산을 오르며(1994년)

        지상의 아름다운 사랑(2000년)

        어둠의 축복(2008년)

        마네킹도 옷을 갈아입는다(2016년)

        가끔은 길이 없어도 가야 할 때가 있다(2020년)

평론집 : 작가의식과 현실(1997년)

           세계화 시대의 지역문학(2002년)

           현실의 눈, 작가의 눈(2004년)

산문집 : 원이의 하루(2015년)

계간 사람의 문학발행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광역시 지회장 역임

대구 이육사기념사업회 상임 대표 역임

10월 문학제 위원장

사단법인 10월 항쟁 유족회 한국전쟁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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