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커피콩이 걷는다 (박월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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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커피콩이 걷는다 (박월수 수필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12.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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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콩을 간다. 팔이 아프다. 언젠가부터 말썽인 팔꿈치 탓이다. 어지간하면 자동 기계를 써도 될 텐데 오랜 습관은 고치기 어렵다. 손으로 갈면 더 맛있을 것 같은 고집 때문이기도 하다. 여태 연필로 초고를 쓰는 버릇도 커피콩을 손으로 가는 이유와 닮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빠른 것 보단 느린 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데 실제로는 몹시 서두르는 성격이다. 커피밀 손잡이가 저절로 돌아가는 걸 보니 다 갈린 모양이다. 서둘러 뚜껑을 연다. 갇힌 향이 화르르 쏟아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 마시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신다. 이만하면 지독한 중독이다. 더구나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 커피는 내 혈관을 타고 모든 죽어있는 촉수를 건드린다. 느슨해진 감정을 깨어있게 한다. 커피가 내게 주는 지극한 위안이다. 팔이 아프도록 부지런을 떤 탓에 산미가 매력적인 에티오피아 예가체프가 그득하다. 함께 사는 강아지는 당연한 순서라는 듯 나가자고 보챈다. 뜰에 앉아 갓 내린 커피를 음미한 후 저와 같이 잔디마당을 걷자는 말이다. 습관은 말 못 하는 강아지도 수다쟁이로 만든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주방 바닥에 커피콩 하나가 떨어져 있다. 아침에 원두를 갈 때 튀어나간 모양이다. 어차피 커피가 될 운명인데 끝까지 뻐팅기는 그런 녀석 꼭 있다. 허리를 굽혀 주우려는데 커피콩이 움직인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분명히 걷는다. 희한한 조화다. 거실 탁자에 놓인 돋보기를 끼고 거듭 확인한다. 커피콩 색깔이 유난히 까맣다. 짚이는 데가 있어 장갑을 끼고 콩을 집어 펴 놓은 휴지 위에 올린다. 보일락 말락 하는 발과 뾰족한 입이 있다. 살 떨리게 징그러운 진드기다. 모질다싶도록 꾹 눌러버린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강아지를 들여놓을 때였다. 씻는 걸 마뜩찮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약해졌었다. 늘 아픈 팔도 거기에 한몫 했다. 선심 쓰듯 그냥 들여놓았다. 풀잎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털 달린 짐승의 몸에 얼씨구나 올라탔을 진드기가 자리 잡을 틈을 준 것이다. 제 몸의 수만 배가 되도록 흡혈을 하고 빵빵해진 나머지 강아지 몸에서 저절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둔 꼴이 되었다. 얼른 강아지를 살핀다. 귓바퀴 안쪽이 진드기에 뜯겨 피딱지가 앉았다. 이 지경이 되어도 주인을 나무라지 않는 강아지가 기특하고 안쓰럽다. 내 눈에 띄지 않았다면 홀쭉해진 진드기는 다시 털 속에 파고들어 강아지를 괴롭혔을 터이다.

어떤 것이 향기로운 커피콩인지 피를 빠는 진드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닮은 것들 투성이다. 나는 몇 해 전, 커피보다 더 아끼고 보듬는 글을 도둑맞았다. 내 글을 따라 베낀 이가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걸 늦게야 알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진드기가 피와 살을 갉아먹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원작의 향기를 옹호해준 선후배 문인들이 있어 다시 찾을 수 있었으나 진드기에 물린 자국처럼 흉터는 남았다.

사람들은 제각기 사는 일에 바빠서 무엇이 커피콩인지 무엇이 진드기인지 마음 쓰지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커피콩이 무더기로 걸어 다니는 섬뜩한 광경을 지켜보는 날이 올까 두렵다.

 

박월수 작가

 

<박월수 작가 소개>

1966년 대구 월배 출생

2005년 수필문학 초회 추천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달’로 등단

2009년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젊은수필 2012’, ‘현대수필 100년’, ‘더수필 2019’, ‘더수필 2020’에 작품 수록

2021년 수필집 『숨, 들이다』 출간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 경북문인협회 작가상

매일신문 매일춘추와 대구일보 에세이마당, 사단법인 경북북부권 문화정보화지 ‘컬처라인’ 필진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일보 오피니언 필진을 하고 있음.

한국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경북문인협회, 안동교구가톨릭문인회, 수필세계작가 회원.

현재 객주문학관 상주작가, 청송문인협회 회장, ‘청송문학’ 편집장, 청송 ‘시를 읽자’ 회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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