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송강 습지 (박월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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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송강 습지 (박월수 수필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10.0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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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의 봄은 버드나무 우듬지에서부터 온다. 연둣빛 새순이 와글와글 피어오르면 가부좌를 틀고 묵언수행에 들었던 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다. 송강 습지의 봄은 내가 가장 편애하는 풍경 중에 하나다. 멀리 봄물 든 습지 아래 잠자던 생명들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린다. 가까이 가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둔다. 좋아하는 것들은 늘 아껴가며 보고 싶기 때문이다. 어천교를 지나 임하댐 초입까지 습지의 버드나무는 끝도 없이 펼쳐진다. 연두의 향연은 때로 꽃보다 아름답다.

습지를 끼고 있는 반변천은 일월산에서 발원해 임하로 흘러든다. 일월산을 출발해 협곡을 따라 흐르는 물을 버드나무는 날마다 보고 자란다. 내가 보는 연두는 해와 달을 품은 일월산 산 빛을 닮았다. 이른 봄에만 볼 수 있는 눈 시린 빛깔이다. 저 빛 시들해지면 어느새 먼 산에 등불을 켠 듯 산 벚은 필 것이다. 반변천이 키우는 것들 중엔 토종 민물고기인 잉어며 참붕어, 누치, 백조어, 드렁허리, 각시붕어, 쉬리가 있단다. 그중에서도 나는 영국 신사라 이름 붙은 누치를 좋아한다. 날렵하게 잘 생긴 녀석을 어릴 땐 ‘눈치’도 없이 ‘눈치’라 불렀었다.

송강 습지는 임하댐 상류에 자리해 있다. 자연 생태 환경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곳이다. 생태 자연 일 등급 권역에 든다고 하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것도 없다. 건강한 습지에는 생물의 종이 다양하게 서식하기 마련이다. 지역 주민은 이곳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분류되는 얼룩새코미꾸리를 발견했다는 얘길 들려주었다. 어떤 녀석일까 궁금하다. 사진에서 보는 것 말고 늪에서 헤엄치는 광경을 볼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한다. 멸종 위기종인 노란잔산잠자리와 흰목물떼새와 물방개도 서식한다니 생태의 보고인 셈이다. 희귀한 생물들을 품은 습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날마다 찾아가 보듬어 주고 싶다.

습지의 규모는 축구장 열아홉 개를 합친 정도다. 일 년 중, 많은 비로 인해 물에 잠기는 기간은 한 주에 그친다니 버드나무에겐 다행한 일이다. 뿌리에 숨구멍이 있어 물속에선 오래 살 수 없는 식물인 탓이다. 버드나무는 물을 좋아하고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예부터 우물가에 주로 심었다. 이곳 습지에 무더기로 자라는 버드나무는 수질 정화는 물론 생태이동 통로로 이용된다. 야생 동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때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로도 쓰인다. 버드나무가 사라지면 동물들은 노숙자와 다름없는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스트레스에 시달린 새들은 더 이상 알을 품지 않고 덩치 큰 동물들은 살 곳을 찾아 떠날 것이다. 버드나무는 습지를 살아 숨 쉬게 한다.

습지는 다양한 생명들을 품는 일 외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온실 가스로 인한 환경오염이 심각한 이때 댐 생태공간의 복원은 무엇보다 시급하다. 자연 생태를 기반으로 한 탄소 중립을 이루는 일은 인류의 미래와도 맞닿아있다. 온갖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습지를 원래대로 돌려주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습지 내에서의 농작물 경작은 소중한 자연 생태 환경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다. 서둘러 개선되어야 하지만 농가와 수자원공사의 입장 차이가 쉬이 좁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군데군데 농지로 쓰이고 있는 땅이 보인다.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조금 더 멀리 바라보는 혜안이 필요할 때다.

습지를 가까이 보기 위해 찰랑이는 연둣빛 속으로 발길을 옮겨놓는다. 버드나무 얇은 그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던 장끼 한 마리 사람 발자국 소리에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멀리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근처에 까투리라도 숨겨놓은 모양이다. 어쩌면 이곳보다 안전한 피신처는 없다고 여기는지 모른다. 자그마한 웅덩이에 정강이까지 잠긴 버드나무 몇 그루 고사한 채로 서 있다. 잘못 뿌리내린 나무로 인해 습지의 물이 오염될까 불안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두덩에 자리해 살아남은 나무는 먼저 간 나무의 몫까지 함께 살아낼 걸 안다. 웅덩이를 말갛게 만들고 그 이름처럼 멀리까지 뻗어나갈 것이다.

습지가 보이는 언덕에서 일몰을 맞는다. 풀냄새 머금은 나무들이 물드는 석양을 베고 꿈꿀 채비에 든다. 아직 할 일이 남았는지 섶 비빔질 소리 나른한 풀숲에 새들의 지저귐 끊일 줄 모른다. 물옷을 입은 촌부가 해거름을 기다려 거랑 속에 발을 담근다. 다슬기를 잡는 모양이다. 반딧불이 유충의 먹이가 되는 다슬기를 싹쓸이하지는 마시라고 나는 속으로 읊조린다. 멧비둘기 한 마리 내 맘 알았다는 듯 꾸욱꾸욱꾸꾸욱 거리며 날아간다. 아름다운 시기를 지나는 습지를 등지고 나도 봄꿈을 꾸러 간다.

 

박월수 수필가

 

<박월수 작가 소개>

1966년 대구 월배 출생

2005년 수필문학 초회 추천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달’로 등단

2009년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젊은수필 2012’, ‘현대수필 100년’, ‘더수필 2019’, ‘더수필 2020’에 작품 수록

2021년 수필집 『숨, 들이다』 출간

매일신문 매일춘추와 대구일보 에세이마당, 사단법인 경북북부권 문화정보화지 ‘컬처라인’ 필진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일보 오피니언 필진을 하고 있음.

한국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경북문인협회, 안동교구가톨릭문인회, 수필세계작가 회원.

현재 객주문학관 상주작가, 청송문인협회 부회장, ‘청송문학’ 편집장, 청송 ‘시를 읽자’ 회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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