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당 (박월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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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당 (박월수 수필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10.0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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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마당엔 주인이 여럿이다. 매화향이 진동하더니 키 작은 꽃들이 차례로 핀다. 나물로도 먹는 원추리는 벌써 싹을 올렸는데 화살나무의 새순은 아직 나올 기미가 없다. 화살나무 햇잎은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나물이지만 나는 단풍이 고와 심었다. 키 작은 수선화며 정열적인 빛깔의 명자도 봉오리를 맺었다. 마당 귀퉁이엔 냉이꽃도 필 채비를 한다. 봄은 날마다 기적을 낳는 중이다.

꽃향기 쫓아 꿀벌이며 나비가 모여든다. 지난겨울 유례없는 이상기후로 인해 집을 나갔다가 동사해버리고 돌아오지 못한 벌이 많다는 소식에 걱정이 앞섰다. 벌의 안녕은 생태계의 건강지표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마당엔 예년만큼 많은 벌들이 날아왔다. 가장 먼저 핀 회양목 꽃엔 꿀벌이 열매처럼 다닥다닥 열렸었다. 붕붕거리는 날갯짓 소리 하도 요란해서 무딘 나도 회양목 꽃이 핀 줄 눈치챌 수 있었다. 새끼에게 젖을 물리듯 가진 걸 내어주는 볼품없는 회양목이 한껏 우러러 보였다.

심은 적 없어도 피는 꽃 앞에서 나는 늘 갈등한다. 그냥 두면 마당 전체를 위협할 것이다. 양지꽃이며 민들레, 늦게 피는 벌노랑이꽃이며 토끼풀꽃이 그렇다. 그런데도 쉬이 뽑아내지 못한다. 제 맘대로 피었어도 꽃은 꽃이어서 예쁘다. 벌 나비는 사람처럼 꽃의 경계를 짓지 않는다. 꽃마다 빼놓지 않고 입맞춤한다. 아무 데나 피었다고 뽑아버리자니 꽃에게도 벌에게도 미안하다. 곡절 많은 편지라도 써서 그네들에게 건네고 나면 뽑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꽃 천지인 마당을 공유하는 벌 나비는 겨우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걸까.

벌의 출처를 따지고 들자면 그리 힘들 것도 없다. 이웃에 벌을 치는 집은 서너 집이 고작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벌통을 가진 이는 노총각 J 씨다. 지난해 맛있는 꿀을 땄다고 자랑하던 이장님은 동해를 입어 꿀벌 태반을 잃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마당을 드나드는 꿀벌은 J 씨를 빼다 박았다. 꽃이 피기 전부터 우리 닭장에 오글오글 모여 모이를 축내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도통 취미생활이란 걸 모르고 일만 하는 J 씨를 닮아 꿀벌도 저리 부지런한 모양이다. 죽은 듯 엎드렸다 일어나 꽃을 피우고 벌 나비를 불러들이는 봄 마당이 참으로 기특하다.

봄 마당이 분주한 건 꿀벌 때문만은 아니다. 귀를 간질이는 새소리 종일 끊이지 않는다. 전깃줄을 벗어난 박새가 징검다리 건너듯 주춤주춤 허공을 난다. 누군가 따라다니며 보이지 않는 디딤돌을 받쳐주는 모양이다. 허공을 짚으며 나는 건 박새만의 특허다. 가까운 나뭇가지에 똑 닮은 녀석 하나가 앉았다. 구애를 하는 모양이다. 조막만 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 우렁차다. 아마도 청춘사업에 목숨을 걸었나 보다. 결혼에 시큰둥한 우리 아이들이 떠오른다. 봄 마당을 가득 채운 박새 노랫소리 들려주고 싶다.

마당 앞을 흐르는 너른 거랑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목청 좋은 박새가 소리 높여 노래하더니 거랑 쪽으로 날아간다. 마른 목을 축이러 가나보다. 거랑엔 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 숲은 울창하니 생명이 깃들이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래서일까 참으로 귀한 녀석들을 눈앞에서 마주한다. 뜰에 앉아 봄꽃을 감상 중인데 계곡 너머에서 왔음 직한 녀석 둘이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당을 가로질러 저쪽 산으로 가버린다. 눈 깜짝할 순간이다. 윤기 반지르르한 털과 긴 꼬리가 하도 선명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멸종 위기종인 담비다. 짧고 강렬한 자연 다큐 한편을 예고편도 없이 보았다.

가만 생각하니 초대하지 않아도 마당을 찾는 녀석들은 또 있다. 앞 거랑에서 놀던 늙은 수달도 환한 낮에 왔었다. 마실 온 수달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허둥대다 탈선한 아들 나무라듯 해서 거랑으로 돌려보냈다. 털이 듬성듬성 빠진 병든 너구리도 다녀갔고 한밤중에 새끼 거느린 오소리가 어슬렁거리는 것도 보았다. 꿩 식구들이 뒷마당을 드나드는 일은 예사고 아예 뜰을 점령한 꽃뱀이 일광욕을 즐기는 일 또한 흔하다. 어떤 땐 내가 밀림에 있는지 농가 마당에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숨탄것들 찾아드는 마당이 사실 참 좋다.

 

박월수 수필가

 

<박월수 작가 소개>

1966년 대구 월배 출생

2005년 수필문학 초회 추천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달’로 등단

2009년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젊은수필 2012’, ‘현대수필 100년’, ‘더수필 2019’, ‘더수필 2020’에 작품 수록

2021년 수필집 『숨, 들이다』 출간

매일신문 매일춘추와 대구일보 에세이마당, 사단법인 경북북부권 문화정보화지 ‘컬처라인’ 필진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일보 오피니언 필진을 하고 있음.

한국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경북문인협회, 안동교구가톨릭문인회, 수필세계작가 회원.

현재 객주문학관 상주작가, 청송문인협회 부회장, ‘청송문학’ 편집장, 청송 ‘시를 읽자’ 회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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