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뚱딴지와 멧돼지 (박월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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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뚱딴지와 멧돼지 (박월수 수필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09.2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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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의 고개를 지나는 노모가 급격히 수척해졌다. 직립의 몸을 지탱해 준 두 다리는 꼬챙이처럼 얇아지고 낭랑하던 음성은 찾아볼 수 없다. 지구를 휘감은 바이러스는 노모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던 일상이 무너지니 기력이 쇠하는 건 순간이다. 외출을 삼가고 달달한 간식만 즐겨 찾는다. 혈당이 제 맘대로 치솟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약으로도 잡히지 않는 당뇨가 말썽이다. 혈당에 좋은 식재료를 짚어보자니 버려두다시피 한 뚱딴지 밭이 퍼뜩 떠오른다. 싹이 나오기 전 지금이 캐기에 적기다.

울타리 바깥에 마른 계곡을 끼고 한 뼘이나 될까 한 땅이 있다.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던 모양으로 우리가 이사했을 땐 묵정밭이 되어있었다. 버려두기 아까워 그늘진 곳엔 표고 목을 세우고 나머지 빈터에 뚱딴지를 심었다. 국화과에 속하는 뚱딴지는 식용으로 먹는 뿌리보다 꽃에 더 눈길이 가는 식물이다. 오죽하면 꽃과는 전혀 닮지 않은 못생긴 뿌리 탓에 뚱딴지란 이름을 얻었을까. 꽃을 보려고 심어둔 뚱딴지인데 오늘은 그 뿌리를 캘 참이다.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내밀다가 흠칫 놀란다. 뚱딴지 있던 자리가 휑하다 못해 움푹 팼다. 멧돼지 가족이 떼거리로 다녀간 모양이다. 계곡 너머 야산은 멧돼지 전용 목욕탕이 있을 정도로 녀석들이 설치고 다니는 곳이다. 가까이 있는 맛있는 뚱딴지를 그냥 둘리 없다. 해마다 도둑을 맞는데도 여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곤 해서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녀석들이 무슨 예의를 차릴 줄 알아서 주인 노모의 당뇨 처방에 쓸 것까지 생각해 남겨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몇이 있어 꽃 피우면 다행이다.

기름진 땅의 유기농 뚱딴지를 잃고 쿠팡을 접속한다. 뚱딴지를 검색하니 흡사 생강 같은 돼지감자가 줄줄이 딸려 나온다. 생 돼지감자며 말린 돼지감자, 볶은 돼지감자, 자색 돼지감자가 제각기 단장하고 손가락을 유혹한다. 무엇을 누를까 한참 망설이다 볶은 돼지감자를 콕 집어 주문한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도둑질해간 멧돼지 덕분에 손에 흙 한 줌 묻히지 않고 효도하게 생겼다. 지갑을 그리 축내지도 않는 가격이다. 야생에서도 잘 자라는 뚱딴지가 사람이며 짐승에게 제대로 보시를 하는 것 같아 지극한 마음이 든다.

초저녁부터 앞 들판에 놓인 농로를 따라 불빛 하나가 움직인다. 포수가 모는 차다. 유해조수를 찾아 늘 같은 코스를 순찰한다. 주민의 신고가 들어오면 그리로 우선 출동한다. 우리 과수원이 멧돼지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그들이 다녀갔다. 그런 덕분인지 땅속에 사는 굼벵이를 먹으려고 넓은 과수원 바닥을 헤집어 놓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뿌리가 반쯤 드러난 나무들이 동해 입는 걸 막기 위해 많은 품을 사서 밭을 손보아야 했다.

뭉툭한 멧돼지 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기인지 과수원을 망칠 뻔하고서야 알았다. 최상위 포식자가 된 멧돼지가 발달한 후각을 겸비하고 농민을 위협하니 함께 살아갈 이웃이라 할 수 없었다. 경계해야 할 골칫거리 짐승에 불과했다. 녀석들의 날카로운 송곳니에도 꿈쩍 않을 철망으로 울타리를 쳤다. 녀석들이야 굶든 말든 내 밥그릇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산과 맞닿은 과수원은 원래 그들의 터전이었을지 모르는데 지금껏 내가 주인인양 행세했다. 녀석들을 나쁘다고 말하는 건 사람의 잣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사람인 내가 침략자일 수 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뚱딴지 뿌리 몇은 용케 살아남았을 것이다. 땅을 헤집어 놓은 것만 봐도 멧돼지는 그리 꼼꼼한 짐승이 아니다. 더구나 뚱딴지는 왕성한 번식력 탓에 어지간하면 밭두둑에 심지 않는 식물이다. 살아남은 뚱딴지는 살뜰히 제 식구를 불려 갈 게 뻔하다. 팔월이면 어김없이 탐스러운 꽃을 피워놓고 저를 기다리는 나를 불러낼 걸 안다. 그러면 나는 노모와 손잡고 노랗게 흔들리는 뚱딴지 밭에서 달콤한 꽃멀미에 취할 테다.

 

박월수 수필가

 

<박월수 작가 소개>

1966년 대구 월배 출생

2005년 수필문학 초회 추천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달’로 등단

2009년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젊은수필 2012’, ‘현대수필 100년’, ‘더수필 2019’, ‘더수필 2020’에 작품 수록

2021년 수필집 『숨, 들이다』 출간

매일신문 매일춘추와 대구일보 에세이마당, 사단법인 경북북부권 문화정보화지 ‘컬처라인’ 필진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일보 오피니언 필진을 하고 있음.

한국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경북문인협회, 안동교구가톨릭문인회, 수필세계작가 회원.

현재 객주문학관 상주작가, 청송문인협회 부회장, ‘청송문학’ 편집장, 청송 ‘시를 읽자’ 회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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