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5월 광주, 청송의 정치의식과 정치문화를 고민하다. (박기순 진산서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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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월 광주, 청송의 정치의식과 정치문화를 고민하다. (박기순 진산서당 대표)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05.12 17:43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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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기고는 (구)청송군민신문 단체 카톡 방에서 박기순 청송군민신문 발전위원회 위원장이 올린 여러 글 중 일부에 대해 본 기자가 기고 형식으로 박 위원장에게 투고를 제안하였고 박 위원장이 흔쾌히 수락한바 가능한 큰 틀에서 내용이 바뀌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편집 과정만 거쳤음을 밝힌다.

 

장면 1.

세계 유일의 냉전으로 인한 분단이 벌써 70년이 지났다 싶고, 반공이니 종북이니 서로 물고 뜯으면서도 이만큼 온 게 눈물겹게 고맙고 자긍심을 느껴요.

예전에 청송에 '청송인'이란 이름의 인터넷 사이트가 있어서 자주 들락거린 기억이 납니다. 청송인들 정말로 대단해요.

ㅇㅇㅇ 형님께는 죄송한데, 형님이 많이 투박하시지요. 오래 수고하셨고, 가만 보면 지금도 피가 철철 끓고 있다 싶어요. 이래저래 많은 고견 들려주시고 틈틈이 생각의 차이와 같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큰 목소리로 얘기한 것은 이 방이 정치 선전, 선동장이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목소리 크다고 누가 새겨듣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공해가 될 뿐이지요.

경북 청송의 우리의 정치적 대표 목소리는 반공과 경제적 풍요일 것입니다.

4·19, 5·16의 정치적 황무지에서 박정희, 김종필을 필두로 한 군인 세력이 열어 놓은 우리의 미래는 실로 전무후무한 길이었다 싶습니다.

박정희 군사 정변 며칠 후에 북에서는 군사정변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지지 성명까지 준비했지만, 김종필의 전략은 친미 반공이었고, 부정부패의 척결과 경제 성장이었습니다.

이 결정의 역사적 의미는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오늘 미얀마의 아웅산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존경받던 네루, 나세르, 티토, 수카르노 등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박정희는 단호하게 선택하였고, 실제로 어마한 실력과 추진력으로 잠자는 우리 모두를 일깨웠다 싶어요.

오늘의 미얀마를 보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요. 물론 역사나 정치라는 게 몇몇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 군인들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싶어요.

근면, 자조, 협동은 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너무나 와닿는 삶의 지침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졸업 무렵에 4H 하시던 한 형님을 초대해서 들은 성공담과 미래 개척에 대한 연설은 지금도 저에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 선구적이었고요. 저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추억이고 세상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입니다.

87년 벽두부터 박종철, 이한열이 그랬고 6·29 선언 나오면서 6공 개헌작업을 했지요. 그 노태우죠.

그리고 30년이 지났지요. 우리 자식 세대들이 본 거는 이게 다지요.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마침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민주화되면서 우리도 북방 외교를 시작하면서 소련과 중국과 국교를 맺었지요. 남북 유엔 동시 가입도 하였고요.

이때가 우리 한국의 부흥기였다 싶습니다. 중국 진출하고 서해안 시대가 열리는 등 우리 모두가 아는 얘기고 바둑으로 치면 복기해 보면 되지요. 그리고 OECD 가입하고 세계 10등이 되었지요. 엊그제는 ILO 기준 중에 7개를 동의하는 국회 비준이 있었지요.

우린 더 이상 개발도상국도 한강의 기적도 아니고 세계를 책임져야 하는 나라가 된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무얼 하든 청송은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고향일 겁니다. 제 가슴, 우리의 가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이는 걸요.

 

장면 2.

"정치가 바른길로 가도록 정치 혁명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쿠데타가 또 한 번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생년을 여쭤 봐도 될까요? 프로필 사진에 아이가 손녀가 아니겠나 싶은데, 제가 아는 대로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한 번 가지끈 얘기해 보겠습니다.

1973년인가에 윤필용 사건이라고 있었어요. 윤필용은 육사 8기로 당시 장군이었는데, 원래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합니다.

이후락은 그때 북에 가서 남북 7·4 공동 성명을 이끌었고 곧바로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이후락이가 많이 뜨고 있었죠. 윤필용도 2인자 급인데 지원하고 있던 11기 후배 군인들이 이후락과 척지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다고 해서 이후락과 가까이 지내게 되고 급기야 이후락에게 박 대통령이 노쇠하니 이제 후계자가 되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고 해요.

이 사실을 전두환을 통해 들은 박종규 경호실장은 전두환이 직접 보고하도록 했고, 이때는 무시했는데 나중에 신문식 서울신문 사장과 골프를 하다가 또 듣게 되면서...

후계자 문제만큼은 박 대통령에게는 민감한 사안이었고, 서로 견제시키면서 늘 관리해왔다고 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당시 보안사령관인 8기 강창성을 청와대로 불러서 윤필용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합니다.

윤필용이가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다 싶고, 같은 8기 동기생이라 제대로 보안요원을 파견하지도 않고 있어서 아는 것도 없고 해서 강창성은 윤필용을 따로 조용히 만나서 각하께 가서 비는 게 어떠냐고 권했고, 각하께도 조사해보니 술 먹고 한 실수라고 보고했는데, 박 대통령은 노발대발 조사를 그따위로 하느냐고 면박을 주지요.

급기야 강창성은 거짓말 탐지기를 다룰 줄 아는 조사 요원 누구더라? 등 각종 녹취와 문서들을 모조리 뒤지게 하는 수사팀을 별도로 꾸리고, 이 고문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바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있다는 것이었죠.

11기부터 15기까지던가? 뭐 영남 출신들 중심으로 꾸려서 군내 각급 인사 라인에 점조직으로 박혀서 자기들의 진급을 앞당기는 등 세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제 앞쪽에 걸림돌이다 싶은 8기를 건드리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좌우간 강창성은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유신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이후락, 윤필용 등을 세게 건드리면 민심에 도움이 안 되니 아래쪽 지지 세력을 손발을 끊어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면서 하나회의 존재를 보고하게 되죠.

그런데, 이걸 들은 박 대통령은 감을 잡았다는 듯이 이를 뭉갰다고 해요. 하나회는 5·16 당시에 육사 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의 군내 사조직인 오성회가 발전한 영남 라인이죠.

어쨌든 이 보고를 받고 박 대통령은 오히려 강창성을 좌천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요. 강창성은 나중에 12·12 이후에 전두환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10·26과 12·12 그 이후를 얘기하면서, 이를 우리 청송의 정치의식, 정치문화와 엮어서 얘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군부 내 인사를 쥐락펴락하던 윤필용은 예편했고, 이후락은 일본 대사로 나갑니다. 이후락이 일본에서 재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획한 사건이 김대중 납치 사건이죠.

아무튼, 1973년의 별들의 전쟁인 윤필용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존재이고, 박 대통령이 이를 묵인해주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말로 오면서 만성적인 학내 소요와 동일방직 사건, YH 여공 사건, 오원춘 사건 등 각종 산업 현장에서도 분규가 확산되고 있었고, 특히 YH무역의 여공들이 회사 운영 정상화와 체납임금 등 근로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신민당사를 난입, 점거한 사건은 폭발적인 파급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파업에 동조하여 당사를 내어준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결국 국회의원 제명이 됩니다. 이게 소위 1979년 9월의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고 대한민국 입법부 역사에서 유일한 의원 제명 사례이죠.

당시 저는 고3이었는데, 안동 목성동 성당에서도 여름 내내 유신헌법 철폐 현수막이 내걸렸고 종교탄압 중지를 외치는 확성기 소리가 왱왱거렸지요. 이때는 몰랐는데, 이게 나중에 더 커서 보니 안동, 영양, 청송 일대의 가톨릭 농민회와 사제단이 주도한 오원춘 사건이라고 했고, 유신 체제가 몰락하는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이 지역 농민운동이 발전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였지요.

10월에 와서 결국 부마사태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부산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기에 이릅니다. 탱크로 미네, 발포하네 어쩌네 하다가 결국 김재규 중정부장은 박 대통령을 시해하기로 결심하게 되고 이게 10·26이지요.

민심이 많이 떠나 있었다 싶고,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가 많이 틀어져 있었다 싶네요.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의 국무회의 의결로 10월 27일에 수도권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창이 계엄사령관으로 취임하고,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준장(소장?)에게 합수부를 꾸려서 박정희 시해 사건을 조사하게 합니다.

 

장면 3.

잘잘못에 대한 판단이 어디 간단하겠어요? 불편한 마음은 이해되고요. 저는 어떤 입장이나 호불호를 배제하고 가감 없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잘 표현하는 데만 주력하려고 해요.

12·12와 그 후, 그리고 청송 지역의 정치의식과 정치 문화에 대한 소회 정도를 써보려 했던 것인데, 듣기에 거북하신 분들이 많다 싶어요. 어떤 사견을 배제하고 팩트만으로 글을 구성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윤석열이 등장하고, 조국이 등장하고 등 어수선한 시간이 계속되었네요.

 

장면 4.

가령, 윤석열에 거는 희망의 글들에 대해서는 차분하게 잘 쓴 무게감이 있는 글이네요. 꼬투리 잡힐 구석은 여기저기 많지만, 이 글의 역사적 의미 해석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권 지지 여부, 과거 역사에 대한 정통성이나 진영 여부에 따라 네 편, 내 편으로서 끌어당겨서 쓰다 버리고 하는 게 횡행하는 정치판인 만큼, 그의 인기나 쓰임새는 지금 상황에서는 아직은 뒤죽박죽이다 싶습니다. 천천히 많이 생각해보렵니다.

조국을 소환하면 메가톤급 정치 소용돌이에 늘 빠지게 되더군요. 두고 볼 일이다 싶고...

마침 저 위에 ㅇㅇㅇ 님의 조선사 글이 있길래 조선 시대로 비교해 보면, 숙종 때 환국 정치판이 연상된다는...

두 진영 남인, 노론으로 딱 빠개져 가지고 서로 물어뜯고, 피바람 나는 전면전이죠.

 

장면 5.

국민들이 하기에 달렸다 봐요. 민주주의 학습 능력이죠. 어디서 읽었는데, 우리의 수준이 일본이나 미국을 앞질러 간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으로 뿌리를 내렸다 싶고, 이것도 나폴레옹 전쟁기를 거치며 유럽 전역에 전파되기도 했지만, 왕정복고를 하는 등 근 100년간 피를 뿌리며 프랑스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갔다 싶어요.

유럽이나 일본이 300년이나 걸린 역사를 우리는 이제 겨우 60년이다 할 수 있겠는데, 한 세대 30년 잡고, 열 세대 걸릴 일을 우린 고작 두 세대 동안 겪고 있으니 세대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변화를 따라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싶어요. 천태만상의 별일을 다 보고 겪고 하지만 급속도로 궤도 진입하는 뭔가를 늘 보게 돼요.

아, 300년, 60년은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는 시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기업체의 역사나 근대화의 시간이랄 수 있는데, 가령 1945 해방 당시 우리나라 농가인구가 90퍼센트를 넘어가죠. 지금은 귀촌 포함해서 7퍼센트 되려나? 300만 정도.

 

장면 6.

광주, 광주 그러는데, 이것도 재미있어요.

1957년 대선에서 조봉암 후보가 대구에서 70퍼센트를 받는 일이 있었지요.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 장관이었고 여운형 등과 건국준비위원회 일을 하던 좌익이죠. 이후 위협을 느낀 이승만이 아마 1959년인가에 사형을 시키게 하죠.

안동, 대구 이쪽으로 해방공간에서 좌익계 인사들의 숫자가 엄청 많았지요. 박정희 대통령도 이 영향을 많이 받았죠. 혁명 직후에 황태성이가 김일성 밀사로 협상하러 내려오는데, 박 대통령은 간첩으로 몰아 죽이지요. 가형 박상희보다 더 따랐던 고향 형인데도 말입니다.

5·27 광주사태에 버금가는 게 10·1 대구폭동이었고, 5·16 후 대구는 진보가 몰락하는 길로 간 반면에 광주는 지금 1995년인가 법 제정 이후에 대접받는 쪽이 되어 있다 싶다는...

 

장면 7.

저는 주로 위키백과로 공부하는 편인데, 예전에 들은 얘기들, 오늘 일어나는 일들을 논리적으로 꿰어 보는 것이 마치 수학 공부하는 거랑 비슷하기도 하고...

누군가가 군인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듯한 말씀을 하시길래 이건 뭐야 싶어서, 청송 지역의 정치의식이나 정치 문화에 대해서 평소 해오던 고민을 풀어 보고 싶었습니다.

두세 번 더 써야 한다 싶은데, 역시나 불편해하시는 분들이 많고 해서 말 꺼내는 게 조심스럽지요.

위에 솔향기 얘기가 있고, 마침 토요일 무료하게 학원에 앉아 있는데, 꺼낸 얘기 짧게라도 매듭을 지어야겠다 싶어 마무리 글 좀 써보겠습니다.

 

 

장면 8.

학원에 걸린 제 자리 사진에 기암 보이시죠? 한 때 주왕산 1000년 전설에 폭 빠져서 한 달에 한 번꼴로 들락거렸지요. 솔향기. 청솔, 청송이지요.

‘솔’ 담배가 생각났어요.

4공 마지막 대통령이 10대인가요? 11대인가요? 전두환 대통령이 5공 개헌 전에 유신헌법에 따라 장충 체육관인가에서 대통령으로 뽑혔고, 그때 대의원들에게 솔 담배를 나눠 줬나 봐요.

제 집에 형님이 그 자리에서 받은 거 한 보루를 제게 주시더군요. 어쩌면 제가 청송에서 솔 피운 거는 처음일 수도 있겠습니다. 맨날 거북선이나 돈 없으면 은하수로 때우다가 솔 그 향기는 너무 좋았지요. 솔 정말 장수했지요.

저는 79년에 예비고사 끝나고 노량진에 있는 대성학원에서 본고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12·12 그 얘기를 재수생들이 나누는 것을 주워듣고 알았지요. 나중에서야 그날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결정 난 거라고 해석했고요.

대학 들어가니 사람들이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그러더군요.

5월 14일인가 15일에는 서울역까지 행진하여 진출하였고, 한 10만이 모였으려나? 대부분이 대학생들이었죠. 광화문 동상 주위로는 장갑차가 어른거린다는 얘기들이 들려오고...

그때 “이대로 회군하자. 군부에 빌미를 준다. 희생이 클 수 있다. 북이 오판할 수 있다.”고 연설한 사람이 작년 4월에 낙선한 심재철 의원으로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죠. 그리고 회군 불가를 주장한 사람으로 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 어쨌든 회군하였고, 5월 22일 전국 규모의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요.

지난 글에서 얘기한 하나회.

이때는 신군부라고 했죠. 12·12로 군부가 권력과 언론, 방송을 장악했고, 3김이 정치활동 재개하면서 기지개를 켜려고 하는 판인데, 신군부에 의해 모든 게 이미 결정 나 있었지요.

5월 17일 저녁에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있었어요. 기숙사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밤 12시에 자막이 떴죠.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말입니다.

곧바로 제가 기거하고 있던 서울대 기숙사가 있는 낙성대 쪽으로 장갑차와 공수부대가 들어왔지요. 그들의 첫 일성은 “불 꺼! 빨갱이 xx들아!” 그리고 요란한 호각소리와 군홧발 소리.

다음날 아침, 가지고 있는 시뻘건 책은 다 들고 내려오라고 했죠. 기숙사 복도 로비마다 M16 들고 서 있는 군인들에게 졸아서 사람들 별별 교양 책 다 들고 내려오더군요.

체조 대형이라 하나요? 양팔 벌려 간격 맞추어 서고 웃통 벗고 팬티 바람으로 우리는 물푸레나무 방망이로 배를 얻어맞으면서 푹 주저앉고 했지요.

대어 들다 군홧발에 짓이겨지고 지프차로 실려가는 선배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사람은 어찌 되었나 안 잊히고 가끔 어른거리지요. 그리고는 밥을 먹여주고 집에 갈 차비를 주더군요.

그 길로 고향 앞으로 카는데, 나도 청량리역으로 냅다 갔고 거기 왜 그리 대학생들이 바글거리던지...

청송에 돌아오니 방송에서는 '연일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다', '무장공비가 나타났다' 그랬지요. 김대중은 내란음모 수괴 죄로 잡혀가고, 김종필은 부정축재 1호로 가택 연금했다 하고요.

청송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러면 이제 김영삼이가 대통령 되겠구나라고.

그해 가을에 면소에서 대의원 뽑는다고 출마자들이 하는 연설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혜성같이 나타난 전두환이가 이 나라를 북괴로부터 구했다”고 하더군요.

10·26 김재규가 안동농고 출신이죠. 신군부 권정달 등은 안동고이고요. 제가 안동고 29회 졸업생인데, 그때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안동농고 떨어진 별이 한 바가지이고 안동고가 그걸 다 주워 담았다고...

모든 판이 정돈되고 이제 개학을 했는데, 고딩 선배들이 권정달 장학금이 있는데, 저더러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때 그걸 내동댕이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요.

그때부터 내 인생은 다른 길이었다 싶습니다. 가끔 시골에 내려오면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시간이 시작되었지요.

청송의 정치의식, 문화 등 마무리 글은 나중에 천천히 쓰겠습니다. 운이 잘 떼지지 않네요.

저 혼자만 해보는 생각인데, 독일이나 유럽 전역에 네오나치즘이라고 있지요. 자기 민족을 우선시하고 전체주의적 ‘앞으로 나란히’가 최고의 선이고, 그리고 배타적이고, 과거의 영광을 꿈꾸는 복고주의. 그리고 행동은 과격하고 테러도 서슴지 않는 극우. 비록 그 수는 밋밋하지만, 어디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나 세력은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아직 신나치라고 스스로를 규정짓는 세력은 없지만, 그 조짐은 있지요. 두고 볼 일이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반공과 경제성장에 따른 한강의 기적과 가난을 극복한 그 변화는 사실 우리에게는 신화이지요. 마침 이때 초딩, 중딩, 고딩을 하면서 감화받은 아이들이 커서 여기 모인 50대, 60대 우리다 싶어요. 충분한 토양이다 싶네요. 분단의 질곡이다 싶고요.

5·18 광주 민주화운동 특별법이 1995년에 제정되었고, 학교에서는 우리의 아이들이 초딩 사회책에서 중딩 역사책에서 고딩 한국사 책에서 이를 배우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싶고, 이제는 수능에서도 필수 과목이 되어 민주주의 학습을 하는 마당에 “전두환 충성! 필승!”하시는 분들이 이 방을 놀이판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으니 심히 유감입니다.

댁내에 자식들은 물론이고, 사위, 며느리들이 우리와는 다르게 이러한 민주주의 학습을 하고 자랐을 터인데, 우리 청송의 어르신들은 아직도 40~50년 전의 사고의 늪에 빠져 있다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집집마다 이로 인한 갈등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말려도 되지 않고요.

진정, 이 방을 정치판, 놀이판으로 만드실 작정이신지 되묻고 싶습니다.

청송의 여러 기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의회 의원님들이 이 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논의를 경청하고 있습니다. 제발 자중해 주시기를 한 번 더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을 보태면, 사전적 의미로 아무리 정당의 정의나 존재의 목적이 집권이라고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와는 별도의 제도이고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누구를 지지한다’, ‘어느 당은 뭐가 좋고 뭐가 싫더라’ 등 이런 것들 이전에, 민주주의란 그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소통의 방법을 발달시키고 시대의 변화에 맞는 법과 규율과 시스템을 개선, 정비하고, 이를 국민과 소통하고 학습하고 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운영하는 능력이 계속 확충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봅니다.

민주사회에서 교육받고, 상대적으로 경제적 가난에서 자유로웠던 우리의 2세들은 이 방면에서 출중한 역량을 발현해낸다 싶은데,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도시화나 새로운 산업, 정보 사회 등 급변하는 환경에 맞닥뜨리며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는 이 방면에서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사고 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요.

가령, 중앙정치가 아니라 청송군정만 보더라도 군의회 방청객, 회의록을 열람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든가, 예산편성과 결산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이를 주민과 소통한다든가 이런 게 적다는 생각입니다. 소소한 정보공개 요청도 자유롭게 일상화되어 있지 않고요.

작년 한 해 사과 축제를 못했다던가 등 평년과 다르게 여러 행사가 못 치러졌으면 예산이 얼마가 사용되지 못했다. 예비비가 그냥 쌓였다. 코로나 관련 새로운 사업에 쓰였다. 이월되었다. 등 이런 것에 우리 군민이 참여해야 하고, 마침 이 방에서 이런 얘기들이 활발히 논의되기를 희망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어떻습니까?

누가 의원이 되면, 누가 군수가 되면 잘할 것이고, 반대로 누가 되면 잘 못할 것이라고 말들은 많이들 하지만, 우리가 군정을 얼마나 살폈다고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저는 이해되지 않네요.

그냥 내 이웃 동네 사람이니까, 우리 학교 출신이니까, 내와 성씨가 같으니까 이런 게 큰 기준이 되고 있잖아요.

이런 것이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60~70대의 민주주의 학습 역량이 민주주의 교육과 훈련을 어릴 때부터 받고 자란 30~40대 젊은 세대와 현저히 비교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가끔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를 들락거려 보는데 젊은이들은 그들 나름의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새로이 창출, 변화시켜가면서 계속하여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해가는 모습을 읽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가난의 시간을 지나 이제 자식 다 키우고,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고 하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되면서, 이 자리에 모여서, 이제 그동안 못다 한 많은 소망과 한을 분출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퍼 나르기 등이 발달되어 있을 뿐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먹을 뿐,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은 기대하기도 어려운 나이지만 변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정리하는 모습조차 잘 안 보이니 늘 이 점이 아쉽고, 세월이란 게 원래 이런 거냐는 생각도 해봅니다.

좀 더 절제하고 충분히 읽으면서 가끔 자기 생각을 얘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 진산서당 박기순 대표
(주) 진산서당 박기순 대표

 

<박기순 대표 약력>

파천면 관리 출신 (1961년생)

파천초 36회

청송중 27회

안동고 29회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계산통계학과 졸업

(주) 진산서당 대표

청송군민신문 발전위원회 위원장

청송문화원 청송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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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길환 2022-05-13 08:53:41
짝짝짝! 모르는 형님이지만 생각이 멋지십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시대의식이란 개인이 가진 삶의 질곡과 맞물려 표출되는것이 아닐까요? 형제간에도 서로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시간을 마주했을것인데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지요. 누가 위정자가 될것이냐보다 얼마나 군정을 잘 살피느냐가 저는 와 닿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우상 2022-05-13 08:38:52
반갑습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구수하네요. 애정이 깊으시고.

오진희 2022-05-13 08:25:59
그야말로 위태위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살아왔음을 다시한번 느껴보네..앞으로도 좋은글 많이남겨 주세요

이응열 2022-05-13 07:35:40
안동고 수재가 기록하는 40년 추억속 정치 드라마네 대단~ 잘 읽었다

진산서당 2022-05-12 20:54:46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