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수필) - 아지매, 힘내! (서승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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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수필) - 아지매, 힘내! (서승희 작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19.12.16 20: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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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걷는다. 차들이 쌩 지나가도 걷는다. 읍사무소, 농협, 마트, 엄마 집에 갈 때 걷는다. 식당, 가게들, 집, 강아지, 꽃집은 느릿느릿 다가오고 슬그머니 뒤로 한다.

걷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인도를 터벅터벅 걸을 때 저 멀리 방광산을 바라본다. 가깝기도 하고, 친근하고, 햇살이 비치기도 한다. 구름 그림자가 산을 어둡게 하고, 어느 한 부분은 햇빛이 눈부시다. 직접 산에 가면 ‘아, 힘들어. 별로 높지도 않는 게 가파르기도 하지!’ 투덜투덜대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산은 오히려 손에 잡힐 듯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먼 산을 보고 걷다가 멈칫, 길 건너에 눈길을 꽂은 것은 '좀머 할배' 덕분이다. 우리 동네 좀머 할배.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몸에 활기차게 휘적휘적 걸어가시는 폼이 인상적이다. 내가 독점한 길인 줄 알았는데 할배는 어제도 오늘도 마주친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전봇대 뒤에 기민한 동작으로 샥 숨고, 지팡이로 총 쏘는 흉내를 내기도 하신다. 그 광경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할배는 샥! 손동작으로 빨리 지나가라고 하신다.

‘지금은 작전수행 중이야. 얼른 지나가!’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다음날 보면 역시 할배는 지나가는 차를 보고 절도 있는 손동작으로 교통정리를 하시고, 쓰레기더미에서 쓸 만한 물건을 줍기도 하고, 갑자기 거수경례를 척! 하신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니 또 거수경례를 척 하시고는 빨리 지나가라고 절도 있는 손동작을 보이신다.

‘음, 좋아. 현재 상황 이상 무!’라면서 나를 통과시켜 주시는 것만 같다.

“충성!” 경례를 척 붙이니 할배도 따라서 눈썹 위에 손을 갖다 대고 까딱 하시며 지나가라고 하신다.

우리는 꽤 친했다.

‘친했다’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할배와 내가 같이 얘기를 한 적도 없고, 밥을 먹은 적도 없고, 커피를 마신 적도 없었다. 단지 할배와 마주치면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할배는 “아지매, 잘한다!”, “아지매, 최고다!” 하며 엄지를 척 치켜 주었다.

저 멀리서 할배가 걸어오시는 걸 눈이 나쁜 나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할배도 나를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서서히 다가오면서 씩 웃으실 때도 있었다. 세파에 시달린 흔적이 남아있는 인상이지만 할배도 웃고 나도 웃고 여전히 “안녕하세요.”

“아지매, 잘한다.”, “아지매, 최고다!”로 지나치지만 뭔지 모르게 힘이 부쩍 났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늘 걸어 다니는 좀머 씨 이름을 따서 그냥 ‘좀머 할배’라고 할 뿐 할배 이름도 모른다. 사는 곳도 정확히 모른다. 단지 우리 동네에 사신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래도,

내 친구, 좀머 할배가 늘 건강하면 좋겠는데 올해는 거리에서 자주 보지 못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보고 싶다. 교통정리 하시던 다리, 작전수행에 전력을 기울이시던 상하수도 센터 맞은편 거리, 울릉도 순대국밥집 앞 계단에 앉아 김이 솔솔 나는 커피 잔을 두 손에 쥐고 계시던 할배, 누군가 버려놓은 빵덩이를 보고 슬픈 표정을 짓던 할배...거리 이곳저곳에서 좀머 할배가 보인다.

따뜻한 봄이 오면

할배도 피어날 수 있을까?

 

서승희 작가
서승희 작가

 

서승희 작가

전 늘푸른 독서회 회원

현재 청송읍 금곡리에서 창작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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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규 2019-12-17 21:22:54
할배소리 오래만에 듣는군요.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할배 했는데
이제 내가 할배소리듣는군요.
지하철을 타면 무임승차다
어찌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헛 갈린다.
그레도 우리청송에 이런걸 되 뇌이는 분이 있으니 나의 친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