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눌인매화숲을 조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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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눌인매화숲을 조성하면서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19.04.2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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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는 이른 봄 눈 속에서 피어나는 기개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우리나라 선비들이 좋아하였던 꽃이다. 매화에서 청한고절(淸寒苦節)의 선비정신을 보았고, 부처의 환화(幻化)로 여겼으며 때로는 지사나 열사의 혼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리운 사람의 환영으로 애틋하게 바라보는 이도 많았다. 매화를 사랑하던 선비들은 매화를 그냥 매화로 부르지 않고 ‘매형(梅兄)’이라 불렀을 정도다. 매화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을 혹매가(惑梅家)라 부른다. 퇴계 이황,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등도 이 중에 속한다.

조선조 전시기에 걸쳐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며 많은 시를 창작한 분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꼽을 수 있다. 말년에 몸이 쇠하여 병으로 누워서는 “매형에게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며 매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절명하는 순간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72제 107수의 매화시 중 62제 91수는 말년에 따로 책으로 묶었는데, 『매화시첩(梅花詩帖)』이 그것이다. 매화와 묻고 답하는 형식의 ‘ 매화문답시(梅花問答詩) ’ 5제 12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의 매화시들이다. 1566년(명종21) 동지중추부사의 소명(召命)이 내리자 병으로 사직하고 예천(醴泉)의 동헌에서 왕명을 기다리면서 지은 시를 소개한다.

 

풍류는 옛 부터 고산(孤山)을 말하는데 風流從古說孤山

무슨 일로 관아 뜰로 옮겨 왔는가? 底事移來郡圃間

그대 또한 명예를 그르쳤으니 料得亦爲名所誤

이 늙은이 명예로 곤욕당함을 비난마소. 莫欺吾老困名關

나는 관아 뜰이지만 고산을 생각하고 我從官圃憶孤山

그대는 나그네로 구름 계곡을 꿈꾸네. 君夢雲溪客枕間

한 번 웃고 상봉함을 하늘이 빌려주었으니 一笑相逢天所借

사립문에 선학(仙鶴)이 없은들 어이하리. 不須仙鶴共柴關

 

예천 관아 뜰에 있는 퇴계가 묻고 매화가 답하는 시이다. 그대가 있어야 할 곳은 은자의 땅 고산(孤山)이지 관아의 뜰은 아니다, 내가 명예를 탐한다고 비난 말라고 하였다. 매화는 의젓하게 대답한다. 우연히 만나 즐기는 것도 하늘이 준 기회이니, 임포처럼 학(鶴)이 없어도 무방하다. 이처럼 매화와 퇴계는 진정한 은거를 절실히 추구하는 참된 은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추사도 매화와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겼다.

“삼십만 매화나무 아래의 방”이라는 뜻의 삼십만매수하실(三十萬梅樹下室)이란 편액도 썼다. 인장을 모아놓은『완당인보』에는 “매화를 생각한다”는 뜻의 「아념매화(我念梅花)」, “매화의 오랜 주인”이라는 「매화구주(梅花舊主)」라는 것도 있다. 봄, 여름, 가을 좋은 시절 묵묵히 자신을 다스리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매화는 가장 힘든 곳인 유배지에서 예술의 꽃을 피웠던 추사와 많이 닮았다. 이러한 매화를 보며 선비의 지조를 지켜나갔을 것이다.

매화 사랑이라면 단원 김홍도의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우봉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살림이 넉넉지 않아 끼니를 잇기 어려웠던 김홍도는 그림을 팔아 번 돈 3000냥 중에 2000냥은 매화 분재를 사는 데 쓰고, 800냥으로는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나머지 200냥으로 식량과 땔나무를 구입했다”

조선 최고의 혹매가로 조희룡(趙熙龍:1797~?)을 꼽는 사람이 많다. 방에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둘러치고 매화가 새겨진 벼루ㆍ먹으로 매화시 100수를 짓고 큰 소리로 읊다 목이 마르면 매화차를 마시곤 하였다.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는 액자를 걸어두고 홍매(紅梅)를 즐겨 그리느라 붉은 연지 꽃점을 많이 써 방안이 얼룩덜룩해지자 ‘강설당(絳雪堂)’이라 불렀던 매화 사랑꾼이었다.

매화는 원산지인 중국에서보다 우리 땅에서 더 사랑을 받았다. 시인 도연명은 사군자 중 매화보다 국화를 사랑했다. 성리학자 주돈이는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고 평하고 최고로 여겼다. 이처럼 정작 중국에서 매화를 이토록 사랑한 예는 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林逋;967~1028)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인 중에서도 매화를 혹애(惑愛)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천여개가 넘는 천만궁에 봉안된 스가와라미치사네(管原道眞;845∼903)가 제일 유명할 것이다. 미토 번(藩) 9대 번주(藩主)이자 가이라쿠엔[偕樂園]을 만든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齊昭;1800∼1860)도 이에 못지않은 혹애가였다. 봄에 가장 먼저 청초한 꽃을 피우며, 열매는 소금에 절여 군대에서 또는 흉년 때의 구황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매화를 영지 내에 널리 심으라고 권장하였다. 무사였지만 별장 이름을 고분데이[好文亭]라고 지었다. ‘호문(好文)’이 매화의 별명이었기 떄문이란다. 일본 3대 명원에 꼽히는 가이라꾸엔은 매화를 주제로 하는 정원이다.

매화는 한중일 삼국 중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꽃으로 사랑받았지만 대규모로 재배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사학자 겸 언론인 문일평(1888∼1939)은

“나부(羅浮)도 매화의 명소요, 향도(向島)도 매화의 명소이지마는 근역(槿域)에는 이러한 매화의 명소가 없다.”“삼남의 난지(暖地)에 매화가 있기는 있으나 그는 동매(冬梅)가 아니요, 춘매(春梅)이며 경중애화가(京中愛花家) 사이에 예로부터 매화를 배양하였으나 그는 지종(地種)이 아니요, 분재일 뿐이다. 매화를 많이 배양하여 완상(玩賞)에 공(供)함에는 일종 난실장치를 했는데 경성방송국은 곧 옛날 김추사옹의 선세 이래 별장으로 아주 이름 높은 홍원매실(紅園梅室)이 있던 곳이요, 운현궁에도 매실이 있었고 이밖에도 매실 있는 집이 흔하였다 한다.”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규모로 매화재배를 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글이다. 오늘날처럼 재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대규모 재배가 불가능하였을 수도 있다. 매화를 숭앙하여 귀하게 키웠다는 기록은 간간히 찾을 수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절우단과 회연서원의 백매단 등이 그나마 많이 키웠다는 기록이 있는 곳이다.

퇴계는 정우당(淨友塘)이라는 조그만 연못에 연을 심었고 절우사(節友社)를 만들어 소나무와 대나무, 국화를 심어 매화와 더불어 절우(節友), 즉 절개있는 벗으로 삼았다. 1986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매화 고목이 있었으나 그해 고사했다고 한다. 이 매화 고목이 퇴계의 손길이 닿은 나무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산매(陶山梅)라 불렀다. 하회마을의 서애매(西厓梅)와 더불어 경북2매로 꼽혔다.

도산매는 용이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와룡매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정작 도산매는 지바현[千葉縣]의 한 매화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현재 도산서원에는 수령 60여년 정도되는 매화들이 매화원을 비롯 곳곳에 심겨있다. 그러나 퇴계가 매화나무를 키우던 유지(遺址)는 절우사 옛터인 것 같다.

경북2매와 함께 「산청삼매(山淸三梅)」와 「호남오매(湖南五梅)」가 유명하다. 산청삼매는 정당매(政堂梅), 남명매(南冥梅), 원정매(元正梅)를 일컫는다. 남명매를 제외한 두그루는 고사하였다,

호남오매는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천연기념물 486호),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천연기념물 488호), 가사문학관 뒤편 지실마을의 계당매, 전남대의 대명매, 소록도 중앙공원의 수양매를 일컫는데 수양매는 오래전 죽었다.

이들 외에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천연기념물 484호), 화엄사 길상암 앞의 백매(천연기념물 485호)도 명매이다. 전남 곡성 수도암(修道庵)의 매화나무는 잣나무와 함께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남녘 절집에 터를 잡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화를 고소득 유실수로 여기고 대단지에서 재배하였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전남 광양시 다압면의 홍쌍리청매실농원을 중심으로 섬진마을 일대 구릉 마다 수많은 매화농원들이 대표적이다. 매화 피는 시기에는 구름처럼 몰려오는 사람들로 일대의 도로가 막히는 곳이다. 땅끝마을 해남 보해매원은 14만 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인데 3월 중순부터 말까지 별천지를 이룬다. 경남 양산 원동의 순매원 등도 그렇다.

이들 매화농원에서는 남고・백가하・청죽・앵숙・고성・소매・개량매전 등 일본 개량종들이 주로 재배된다. 매실 수확이 주목적으로 개량된 품종들이다. 이곳들은 매실재배를 위한 곳이지 매화를 통하여 선조들의 고귀한 기상을 기리려는 장소는 아니다.

대규모 매화농원 중에서는 매화축제를 하는 곳이 많다. 전남 광양(3월 중순), 경남 하동 산골매화축제(3월말), 제주 휴애리와 노리매공원(2월∼3월), 충남 당진 순성(4월), 강원 원주 매호리(4월), 전남 해남 보해(3월 중순) 등이 그곳이다. 이들 대부분은 꽃 축제로만 운용하여 매화가 지닌 문화적 폭발력과 역사적인 함의를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최근 우리나라 전통매화를 한곳에 모아 공원으로 조성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고매 수백그루를 모아 재배하고 있는 전남 순천의 한 농장도 그 중 하나이다. 경북 영주 순흥면의 한국문화테마파크 조성지(96만제곱미터, 총투자 1470억원)에는 매화 2,380주를 식재하였고, 분재도 350점을 수집하여 두었다. 울진군에는 본래 원남면이었으나 2015년 매화면으로 개명된 곳이 있다. 면소재지도 매화리인데 1997년 매화 1500그루를 가로수로 심은 곳이다. 이곳에도 매화공원을 조성하려 한다.

우리 청송군의 현동면에도 매화정원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눌인리 11만여평에 수만그루의 매화를 비롯하여 야생화 등을 심어둔 곳이다. 우리나라의 고매(古梅) ‧ 정매(庭梅) 등 명매(名梅)들의 후계목들이 주를 이룬다. 중국 일본 등지의 유명한 매화 뿐 아니라 대만과 베트남 등에서 수집한 것도 있다.

매화는 천년을 살 수 있는 나무이다. 중국에는 초나라(?∼B.C.223)때 심었다는 매화도 있다. 당나라 때 매화는 내가 본 것만 대여섯 그루 정도이다. 우리나라 매화 중 선암매와 율곡매는 6백살 이상이다. 눌인매화숲의 매화들도 천년을 살 수 있도록 잘 보살핀다면 머지않아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서리 속에서 홀로 마른 가지 위에 핀 매화는 용기와 강단을 지닌 장수의 고결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매화를 꽃 중의 으뜸, 화괴(花魁)라 부르는 것 같다. 일찍이 선비가 매화를 사랑했던 이유는 아름다워서이기보다는 닮고자 했기 때문일 것 같다. 상황과 여건을 핑계로 개화를 망설였던 우리에게 용기와 강단을 주는 꽃이 매화이다. 지난날 이 땅의 정신을 이룬 유학적 본성을 보여주는 가장 힘있는 상징이며, 여전히 지적인 함의들을 지니고 있는 꽃이다. 갈등과 역경이 심할 때 일수록 매화는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공동체의식을 키워내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쫓기보다는 용기있게 서리를 맞아내어야 할 것이다.

매화는 문화이다. 봄날 잠깐 찾은 국민들에게 매화향기 한 가닥이 평생의 삶을 향기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 정신이 스며들어 올곧은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청송이 되기를 꿈꾸어 본다. 눌인매화숲을 시작으로 각 지역마다 개성있는 매화정원이 들어서서 우리나라 고결한 선비의 지조와 기상이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전파되기를 기원하여 본다.

 

 

양도영 눌인매화숲 지킴이
양도영 눌인매화숲 지킴이

 


 

 

양도영 눌인매화숲 지킴이는 前영남대학교 박물관 학예관으로 대구 시지유적에 대해 전문가이신 고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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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구영 2020-02-29 13:56:52
양도영님 꿈을 이루고 계시니 존경합니다.

김태형 2019-05-08 16:21:50
매화의 아름다움을 익히 알고, 그 아름다움을 몸소 실천하시는 선생님께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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