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짧은 소설39] 토끼와 사루비아 (박명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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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짧은 소설39] 토끼와 사루비아 (박명호 소설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08.0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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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뒷집 철이네는 꽃이 많았다. 텃밭과 마당 여기저기 온갖 가지 꽃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겨울철에도 방안에는 많은 화초들이 있었다. 철이 하면 떠오르는 것은 불노장생의 꽃말을 지닌 사루비아 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앓아누운 철이 머리맡에 피어 있던 사루비아를 잊을 수가 없다.

2.

첫눈이 오자 동네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뒷산으로 토끼몰이에 나섰다. 어디선가 우리들의 소리에 놀란 토끼가 튀어나오길 바라며 꼭, 자기 손으로 잡겠다는 듯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토끼닷!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정말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순식간에 포위대열을 갖추었다. 몽둥이 한 방에 때려누일 각오로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었다. 토끼는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우리의 포위망이 점점 좁아져갔다. 궁지에 몰린 토끼가 철이 쪽으로 확 덤벼들었다. 철이는 순간 뒤로 움찔 물러났고 그 틈을 이용해 토끼는 도망치고 말았다.

“누-꼬?”

철이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 줄 몰랐다.

3.

이듬해 삼월 나는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왔다. 철이는 집안 사정으로 시골에 있는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몇 달 뒤 주말을 맞아 고향에 가니 철이가 아프다고 했다. 그를 찾아갔다. 마당 여기저기에 작약과 모란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지만 방안에는 이상하게도 가을철에나 볼 수 있는 사루비아가 피어 있었다. 앓아누워 있는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그 꽃이 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픈 그를 위해서 그의 어머니가 정성스레 키워놓은 것이리라.

기운이 거의 빠져 핏기 없는 잿빛 얼굴에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영락없는 연약한 토끼의 모습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나를 무척 부러워했으나 나는 그런 동무를 위로해 줄 뚜렷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그의 머리맡 화분에는 사루비아 꽃잎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사루비아 꽃잎은 무척 달콤했다. 운동회 무렵 달리기 연습을 하다가 지치고 배고프면 우리는 같이 그의 마당으로 와서 붉은 꽃잎을 따서 진한 단물을 많이도 빨아 먹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왠지 그 달콤하고 아름다운 꽃이 자꾸만 슬프게만 느껴졌다.

내가 그만 일어서려는데 그가 말했다.

“니도 날 겁재이로 생각하노?”

“니가 와 겁재이고?”

“그 때 말이다. 내가 토끼에게 물러 선 것은......”

캄캄한 밤에도 산길을 혼자 다닐 정도로 담력이 있었던 그가 그깟 토끼에게 겁먹는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토끼의 눈을 보았어. 너무 불쌍하더라......”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때 자꾸만 그가 토끼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구로 왔다. 며칠 뒤 학교에서 송충잡이 가는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철이는 쫓기는 토끼의 눈에서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른다.

 

박명호 소설가

 

<박명호 소설가 약력>

1955년 청송군 현서면 구산동 출생

화목초등학교 44회 졸업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장편소설/가롯의 창세기 등

소설집/ 우리 집에 왜 왔니, 뻐꾸기 뿔 등

산문집/ 촌놈과 상놈, 만주 일기 등

크리스천신문 신인문예상, 부산 MBC 신인문예상

부산작가상, 부산 소설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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