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더불어 정치 (4) - ‘파멸의 전쟁’이 아니라 ‘더불어 정치’를! (오치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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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더불어 정치 (4) - ‘파멸의 전쟁’이 아니라 ‘더불어 정치’를! (오치규 작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05.1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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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권력Power’에 대한 것입니다. 권력은 남을 움직일 수 있는 힘입니다. 남을 움직여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남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동의하거나 복종해 움직여 준다면 일이 쉽겠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의 뜻대로 남을 움직이기 위해서 강제와 폭력이 자주 나타납니다. 이런 강제와 폭력, 두려움의 최고의 단계는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정치의 가장 최종적인 국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정치의 한 국면으로 보는 것을 넓은 의미의 정치라 한다면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되며 가장 비인간적인 파멸을 눈앞에 가져오는 전쟁을 피하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을 좁은 의미의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정치’에서의 정치는 좁은 의미의 정치를 말하며 ‘파멸의 전쟁’에 반대 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정치’는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자는 것이며 전쟁 중에도 타협을 해 평화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늘 타협을 주장하는 평화론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면 말할 수 없는 파괴와 고통이 나타나 즉시 평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납니다.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휴전이나 정전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개성에서는 휴전을 위한 협상이 계속되었고 2년 넘는 기간 동안 158차례에 이르는 끈질긴 협상이 이루어져 정전협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정전협상이 이루어졌던 그 지역은 폭격을 면했고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도 협상을 해야 하며 그것이 ‘더불어 정치’입니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며 인간성을 극도로 황폐화시키는 가장 비극적인 일입니다. 인류 역사상 나타난 수많은 전쟁을 통해 우리는 그런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한국전쟁이 그랬고 최근 벌어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의 참상은 발달된 IT를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으며 세계인들은 그 끔찍한 고통을 생생하게 추체험하고 있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살육과 강간이 이루어지고 총을 들고 전쟁에 참여한 젊은이들뿐 아니라 노인들, 어린 아이들 할 것 없이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우리는 최첨단 영상장치를 통해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도시가 미사일과 포탄에 맞아 순식간에 처참한 폐허로 변하고 금방 살아있던 생명들이 사지가 잘려나간 끔찍하게 시신으로 전락해버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릅니다. 부처님은 하나하나의 생명이 세상 전체만큼의 무게를 가진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진리를 우리들에게 분명히 제시해주셨지만 우리는 그런 하나하나의 세상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우리 손바닥 안에서 매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을 ‘정치’에 포함시키는 넓은 의미의 정치의 개념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정치를 단순한 ‘권력투쟁’으로 본다면 폭력과 전쟁은 어쩌면 정치의 가장 근본적이며 손쉬운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차분히 마주 앉아 설명하고 설득해 동의를 얻는 것은 주먹을 날려 굴복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어렵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를 그저 먹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므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의 짐승’으로 쉽게 변모할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정치’는 이런 ‘파멸의 전쟁’을 막자는 것입니다. ‘타협을 통한 문제의 해결과 삶의 완성’이라고 ‘더불어 정치’를 풀어서 말해 본다면 ‘더불어 정치’는 전쟁을 막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은 폭력과 파멸의 길이지만 정치는 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합니다. 전쟁은 자연의 길, 손쉬운 길, 단순한 길이지만 정치는 인간의 길, 어려운 길, 복잡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들지만 후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타협될 수는 없고 결국 전쟁으로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런 전쟁 중 하나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럽연합과 나토에 편입되어 자유주의적인 서방의 길을 가려는 우크라이나와 이를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는 러시아 사이에는 타협의 길이 없으며 결국 그래서 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을 막으려는 러시아와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미국과 유럽연합까지 관여된 복잡한 국제정세로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긴장과 갈등을 타협을 통해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전쟁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아직 한창 진행 중이고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가 주로 피해를 입었지만 러시아 역시 인적 물적인 측면에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고 있으며 국제 사회의 공조로 서서히 고립되고 있습니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을 통해 입은 피해와 얻은 이익의 득실을 따져봐야 하겠지만 전쟁의 참상과 파괴를 볼 때 이번 전쟁을 통해 양국이 잃은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쉽게 자신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시작된 즉시 평화회담이 동시에 열렸습니다. 22년 2월 24일 전쟁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4일 후 2월 28일 첫 평화회담이 벨라루스-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열렸으니 당사자들이 전쟁 못지않게 평화적인 협상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감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긴 역사를 통해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Holocaust,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르완다의 종족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의 끔찍한 장면들은 여전히 우리 기억 속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이번의 전쟁 역시 그런 끔찍한 기억의 하나로 인류의 기억 속에 각인될 것입니다.

이제 시대는 변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칠고 날카로운 푸틴과 같은 ‘마초’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성 속에 늘 존재하는 마초와 폭력, 전쟁과 복수의 본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이 인간의 삶과 공동체, 역사를 지배하지 않도록 제어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일입니다. 따뜻한 차를 한잔 앞에 두고 길게 주고받는 대화를 즐기는 것은 ‘파멸의 전쟁’을 막고 ‘더불어 정치’가 판치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 모두가 지금 당장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갈등이 있는 분과 따뜻한 차담의 자리를 한번 마련해 봐야 하겠다는 마음이 지금 생긴다면 ‘더불어 정치’를 실현하는 정치인의 자질이 있다고 할 것이며 제 글도 소임을 다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치규 작가
오치규 작가

 

<오치규 작가 소개>

청송군 부남면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정일학원, 종로학원 강사

2017년 가족들과 함께 귀향

오 선생 영어(안동시)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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