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더불어 정치(2) 정치와 ‘더불어’ 사는 길 (오치규 오 선생 영어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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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더불어 정치(2) 정치와 ‘더불어’ 사는 길 (오치규 오 선생 영어학원 원장)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04.01 04: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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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느끼게 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정치적입니다. 나라 전체가 정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둘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을 벌입니다. 방송과 신문, 인터넷은 온통 선거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온갖 비방과 흑색선전, 상대에 대한 공격과 자기편에 대한 방어로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우리 일반인들도 정치에 매몰되어 정치적인 대화와 논쟁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되어 우리가 모두 정치인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정치에 종사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우리 삶의 전부도 아닌데 사실 이런 모습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정치와 담을 쌓고 사는 삶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정치에 억눌려 정치로 가득한 삶을 사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정치와 ‘더불어’사는 삶은 정치와 적절한 ‘거리 두기’를 하며 정치와 함께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삶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정치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관심과 참여는 사실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닙니다. 깊은 역사적인 뿌리를 가진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일반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입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혁명을 통해 ‘시민’들은 왕과 귀족의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정치권력을 획득했습니다. 그때의 시민은 부르주아, 즉 부유한 상공업자들에 한정된 말이었지만 지금은 일반 대중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근대 이전 서양 중세 사회에서 일반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고 그래서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습니다. 각 지역을 영주들이 나눠 다스린 지역들과 강력한 왕권이 지배하는 곳 모두에서 그랬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심지어 성경책을 읽지도 못했습니다. 권력은 지배자가 진리는 성직자들이 독점한 시대였습니다. 일본에서도 서양의 영주에 해당하는 ‘다이묘大名’들이 각 지역을 분할해 통치한 중세가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파멸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서양과 일본의 경우 근대의 산물이지만 우리는 더 오래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참여가 일상에서 단절된 중세를 경험하지 못했고 오래전부터 민초의 자제들이 바로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일이 가능한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조선 시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신동이 태어나 어린 나이에 천자문과 소학, 사서삼경을 떼고 지역에 알려지면 온 가문이 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열성이었고 과거를 통해 일약 중앙 정계로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이 조선사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초들마저 중앙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일제와 근대화 시기를 거치면서도 시험을 통한 관료의 선발로 이런 전통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저는 저의 책 <다시 개천에서 용 나게 하라>에서 우리의 이런 전통을 '교육을 통한 상승에의 열망'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런 전통 속에서 우리는 좌우분열의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과도하게 정치화되었습니다. 이는 적극적인 정치참여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사실 부정적인 측면도 상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둘로 분열되어 가족과 이웃끼리 서로 총칼을 겨누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분열되어 여전히 반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나뉘는 정치적 현실에 영향을 받아 사람들의 삶은 극단적이 되고 분열되었습니다.

정치에 깊이 침윤되어 정치에 억압되어 사는 것도, 정치와 무관하게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치에 짓눌리면 정치의 노예가 되고 정치에 무관심하면 삶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들이 정치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정치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정치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와 ‘더불어’ 살기를 배워야 합니다.

정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정치에 대해 적절한 관심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가 우리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정치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항상 "Money is not everything but something."이라는 말을 해주곤 합니다. "돈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Politics is not everything but something.", 즉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정치와 '더불어' 사는 길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상대를 인정하고 배우자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우자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나의 주인도 종도 아닙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나의 주인도 종도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내가 그것에 전적으로 휘둘리며 살 수도 없습니다. 적절하게 의사 표명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안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는 또 그대로 인정하며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내가 틀린 경우일 수도 있고 내가 옳지만, 상대가 지나치게 완강하게 나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옳은 나의 의견이 관철되도록 노력하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유서를 쓰고 사라진 선거운동 책임자가 있었습니다. 무척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분은 정치인이지만 이미 정치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아니면 5년 후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때까지 성실하게 노력해 자기가 원하는 분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우면 됩니다. 내가 지지하는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며 동반자로 함께 걸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가 바로 서고 정치도 바로 서야 합니다. 자기가 바로 서지 못하면 정치가 우리를 바로 세워주지 않습니다. 정치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 삶 전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치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이웃과 이웃이 서로 대립하고 서로 죽인 피비린내 나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도 이런 시각에서 보면 지나친 일이었고 피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만 조금은 초연한 더불어 사는 정치관을 가지면 우리는 더욱 정치에 대해 여유와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상처를 적게 받을 수 있습니다. 정치는 거친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 일반인들은 거리를 조금 두는 것이 좋습니다. 억눌린 정치도 무관심의 정치도 아닙니다. ‘더불어 정치’가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때입니다.

 

오치규 오 선생 영어학원 원장

 

<오치규 원장 소개>

청송군 부남면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정일학원, 종로학원 강사

2017년 가족들과 함께 귀향

오 선생 영어(안동시)학원 원장

저서: <성적역전 몸 공부법>, <다시 개천에서 용 나게 하라>, <삼국지 권력술>, <유방의 참모들>, <예수님의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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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서당 2022-04-01 14:35:25
좋은 글이네요.
특히 서양사,일본사와 우리의 조선사를 비교한 대목이 와 닿았습니다.
늘 그랬지만, 현실은 암울하고 미래는 잘 안보이고 걱정이 되더라구요.
건전한 상식과 뛰어난 통찰력, 나아가 지도력을 갖추어서 앞으로 20년 후의 내 고향 청송이 모두가 사랑하고 아끼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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