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좋은 아빠는 풍년, 착한 아들은 흉년(배용진 전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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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좋은 아빠는 풍년, 착한 아들은 흉년(배용진 전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2.02.1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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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전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 회장(88세)

 

엄한 아버지 밑에 효자가 난다는 말은 21세기 교육이론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엄하다는 것은 체벌과 인권에 관한 문제인데 인성순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의 교육적 이론이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체벌은 이제 거의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지금의 청소년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왕자나 공주의 위치에서 자라고 있다. 지금의 50~60대 부모는 엄한 교육을 받았고 그 잠재의식이 긍정적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성적이 나쁘다고 회초리로 체벌을 당한 기억이 고맙고 존경이 아니라 원망과 유친(有親)을 헤치고 있다. 갖고 싶은 소지품, 좋은 옷을 사주지 않던 엄마가 미웠다. 어머니가 노쇠하여 삶이 힘들었을 때 "그 옛날 가난한 시절 우리를 키울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하며 팔다리를 만져주는 딸이 얼마나 될까?

지금의 50~60대 부모는 아이들에게 너무나 좋은 부모다. 체벌은 물론 갖고 싶은 물건을 충족시켜준다.

어느 대통령은 언어에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를 유행시켰다.

자신의 경험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나?

성적이 뒤지면 체벌이 아니라 학원으로 설득하고 대화로 풀어간다.

산업화 이전 대가족 시절 50~60대 부모는 오른쪽은 자식 자리 왼쪽은 부모 자리에서 자식과 부모의 의식 감정이 하루에도 몇 차례 교차하면서 좋은 부모, 효도하는 자식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살았다.

산업화 이후 핵가족이 보편화되어 노부모는 농촌, 자녀는 도시 혹은 노부모는 한국, 자녀는 국외로 떨어져 살다 보니 가족공동체의 의식이 없어지고 먼 이웃이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도시 자녀 집에 갔더니 손자가 “할아버지, 왜 우리 집에 오셨어요?"라고 묻는 일화가 있지 않은가. 특히 농촌에 남아있는 부모의 마음은 혼란스럽다. 자신의 자녀가 도시에서 성공하여 손자들과 잘 살아주는 것을 바라며 고독을 극복하고 살아간다.

조물주가 우주 만물을 창조할 때 동물에게는 본능을, 인간에게는 지혜를 주었다고 한다. 조물주는 인간이 지혜를 정도(正道)로 쓰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동물에게 인간들의 반면교사가 될 중대한 윤리적 행위를 인간과 가까이 살아가는 까마귀에게 본능적 행위를 준 것이 반포지효(反哺之孝)의 가르침이다.

까마귀 새끼가 다 자라면 키워준 날짜만큼 어미를 쉬게 하고 먹이를 날라주고 둥지를 떠나간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떠먹여 주는 밥을 먹지 않고 자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부모가 늙고 노쇠했을 때 옆에서 부축하고 부모의 입맛에 맞게 노인식 요리로 봉양하는 반포 자(反哺者)가 몇이나 될까?

현대인이 까마귀에게 배우라고 조물주가 점지한 이치가 신기하다.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고 변화만큼 국가의 복지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반포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

전파 효(電波孝), 계좌 효(計座孝), 양로 효(養老孝)라는 말이 있듯이 전화 안부를 자주 하고 용돈을 챙겨주고 근력이 쇠하면 양로시설에 보내는 것이 현대의 효(孝)가 되었다.

그나마 현대판 효를 받고 살아가는 노령층도 많지 않음이 현실이다.

OECD 국가 가운데 노인 자살률이 일등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한국은 가난해서가 아니고 외로움, 고독감이 가장 큰 원인이다.

부모의 고독감을 줄여주는 자식이 착한 아들이다.

그래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가르치고 있다.

유친이란 대화와 소통이다. 옛날 착한 아들은 말 없는 아버지께 말을 건넨다. "아버지, 방에 불을 더 땔까요?" 하면 아버지는 "됐다. 나무하기 힘든데 아껴라" 이것이 소통이다.

아버지가 연로하여 출입을 못하니 소식이 깜깜이다. 아들은 장에 가서 본 이야기, 장에서 파고 사는 물건값, 온갖 이야기로 세상살이 이야기를 아버지께 전한다. 아버지는 착한 아들을 통해 세상 구경을 하고 대화를 한다. 이것이 부자유친이다.

현대인 중 대부분은 부자무친(父子無親)이고 텔레비전이 유친을 대신한다. 무친은 대화 단절이고 단절은 고독이고 고독은 극단으로 연결된다.

근간 필자 주변에 착한 자부(子婦) 두 분이 노인사회에 회자되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60대 자부 한 분은 고령의 시아버지 노환을 치료코자 서울에 가서 두 달이 넘게 간호하고 치료하여 귀가하는 착한 며느리 이야기다.

50대 자부 한 분은 시어머니가 넘어져 뼈를 다쳐 안동에서 입원 치료 한 달 후 퇴원시켜 주거 거리가 20km가 떨어진 곳인 시댁에 매일 같이 왕래하면서 보살펴 주고 있다.

두 자부의 공통점은 간병인을 쓰지 않고 직접 간호하고 집안일은 남편이 맡아 함께 꾸려가는 착한 모습이 노인사회에 알려져 효부라고 칭찬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몇 가지 곱새겨 볼 일이 있다. 반포지효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조금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특별하게 보인다는 것이 가족관계 상황의 문제와 국가 복지정책에 우리의 윤리적 관습과 접목된 사회보장제도가 시급함을 느끼게 된다.

또 좋은 아빠가 되는데 자녀 욕구를 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부모가 보여야 할 행동철학이 자녀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가족형태를 산업화 이전으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조손(祖孫)이 함께 사는 형태의 모델을 개발하는 것도 부분적으로 농촌의 소멸을 막는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착한 아들의 풍년을 기대할 수 없다. 좋은 아빠가 좋은 민주시민을 양산하고 착한 아들은 국가 정책으로 대체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고 시대의 변천에 순응하는 순리이다.

우리는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더는 고령세대를 고독하고 절망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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