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동(五仙洞) 모임, 404년간 전통 이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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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동(五仙洞) 모임, 404년간 전통 이어지고 있어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19.07.2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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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동(五仙洞) 모임 후손들
오선동(五仙洞) 모임 후손들
방호정에서 점심식사 중인 오선동 모임 후손들
방호정에서 점심식사 중인 오선동 모임 후손들
방호정
방호정

 

오선동 모임 후손들은 7월 28일 12시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181번지에 있는 경북 민속문화재 제51호인 방호정(方壺亭)에 모여 오선(五仙) 선대 조상들의 우의를 되새기며 점심 겸 약주를 한잔하는 등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오선이란 다섯 선비 또는 다섯 신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상주 출신의 창석 이준(숙평), 청송 출신의 동계 조형도(대이), 청송 출신으로 풍애 권익(경보), 동계공의 동생인 방호 조준도(경행), 청송 출신의 하음 신집(여섭)을 말한다.

 

비문에 쓰여진 오선(五仙)을 가리키고 있는 조의제씨
비문에 쓰여진 오선(五仙)을 가리키고 있는 조의제씨

 

이날 모임에 참석한 조의제씨에 의하면 “선대 어르신들은 나이 차이가 크게는 20년씩이나 나지만 뜻이 통하는 각별한 관계의 선비들이었다"며 “1615년 창석공이 이곳 방호정을 방문하여 여러 선비와 학문을 강론하고 안동으로 갈 때 길안 근처까지 전별하기 위해 동행하던 동계공, 풍애공, 방호공, 하음공과 함께 계곡의 어느 반석 위에 앉아 서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즐겼는데 바로 그 계곡 이름을 오선동(五仙洞)이라 칭하고 그 다섯 선비 스스로가 신선의 이름을 지은 것이 이 모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의제씨에 의하면 “이들 선대 어르신들의 교류는 대단했는데 후손들도 그 뜻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매년 1년에 한 번씩 이 방호정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후손들이 술도 대부분 잘하신다”고 한다.

이와 관련 1615년 동계 조형도가 쓴 오선동기(五仙洞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을묘년에 이숙평이 영양(영천의 옛 지명)으로부터 방대에 이르렀기에 나도 역시 함께 노닐었다. 사흘 뒤에 이숙평이 화산(안동의 옛 지명)으로 향할 적에 신여섭, 권경보, 경행이 수행하여 멀리 송제(송사의 옛 지명)로 갈 것을 약속하고 함께 대현의 마루턱에 올라 돌아갈 길에 다다라 보니 좌우로 높은 언덕 좁은 골짜기에 층암절벽이 겹겹으로 싸인 속에 한줄기 돌같이 가파르고 험난하여 사람과 말이 나아갈 수 없어 어느 틈을 따라 넓은 경계로 갈 것인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이때 이숙평이 바라보고 머리를 가로저으며 뒤돌아 갈 듯이 하였으나 그러지도 못하였다. 역촌이 십 리 가량 떨어졌고 위에 한 골짜기가 양쪽으로 열려있고 작은 냇물이 그 중간을 흐르는데 반석 하나를 발견하였으니 대여섯 정도는 앉을 만하였다. 드디어 말에서 내려 옷을 벗고 손발을 씻은 뒤 반석 위에 술과 안주를 벌려 놓고 혹은 자작자음하고 혹은 권하면서 몇 잔씩을 마시니 정신이 상쾌하고 의기가 날아갈 듯하여 자신이 속세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숙평이 말하되 “이 산과 이 골짜기의 이름을 앞의 사람들이 붙여 놓지 않았음은 혹시 조물주가 오래도록 비장하여 우리가 오늘 노닐도록 전하여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산의 이름을 자하(紫霞)로, 골짜기의 이름을 오선(五仙)으로 하였으니 오선은 즉, 우리 다섯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경행이 사다리를 타고 암벽에 이름을 쓰고 신여섭이 먹을 갈아주었다.

상령일호(商嶺一皓)라고 쓴 것은 이숙평이요,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고 한 것은 신여섭이오, 청부우객(靑鳧羽客)이라고 한 것은 권경보이며, 송악서하(松岳棲霞)라고 한 것은 경행이며, 청계도사(靑溪道士)라고 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내를 따라 오르내리며 노래를 화답하며 앉았다가 마시고 읊으며 혹은 암벽에 쓰고 혹은 돌에 쓰니 모두 몇 수의 시였다. 얼마 뒤에야 해가 저물고 산 그림자 내릴세 일호(一皓)가 돌아감에 섭섭하게 전별하고 나와 여섭 등 여러 사람도 드디어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와 그 전말을 기문으로 쓴다“

청송군청 조정모 재무과장이 제공한 동계문집과 방호선생문집에서 발췌한 자료에 의하면 오선이 남긴 시(詩) 중 오선, 오선동에 관련된 시가 많은데 일부를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 松鶴棲霞 -

杖屨聯翩入紫山 짝지 짚고 줄을 지어 자하산에 들어오니

翛然一皓自商顔 초연한 한 늙은이 신성모습 방불하다.

留題石面仙緣足 돌에 새긴 시와 이름 신선연분 얻었으니

塵事從今不我關 이제부터 나에게는 풍진세상 할 일 없다.

附原韻 (원운을 붙임)

- 商山一皓 -

別時西日巳含山 어느 듯 이별이라 서산에 해가지니

良覿何因更解顔 좋은모임 어이하여 다시한번 웃어볼꼬

十里靑松歸去路 십리허의 푸른솔밭 돌아가는 길목에서

忍聽求友鳥間關 벗을찾는 새소리는 참아어이 들으리

附次(차운을 붙임)

- 靑溪道士 -

琪樹瓊林四壁山 깊은골 좋은숲에 사면이 산이로다,

衣裳縞白五蒼顔 흰옷입은 다섯노인 얼굴만은 푸르구나.

蹁躚盡日忘歸去 종일도록 노닐다가 돌아갈길 잊었구나,

何處人間更我關 세상사람 어느누가 나의 행색 비웃으리.

- 靑鶴道人 -

十年來往此江山 십년동안 왕래하던 아름다운 이강산에,

江鳥山花摠識顔 좋은 산 새와 꽃이 모두가 구면인데.

多少風光收未盡 그 많은 좋은풍광 볼 것이 너무많아,

不知征馬涉間關 험한길 가는걸음 괴로움을 몰랐더라.

 

오선동 오선생 유적비

 

동계공 11대 후손 조용준 본지 발기인에 의하면 “후손들이 오선동의 뜻을 모아 오선생(五 先生) 유적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계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며 “보통 각 종중 대표 어르신들과 젊은 유사 등 대거 참석하였으나 이제는 어르신들이 다들 연로하시고 후손들이 흩어져서 살다가 보니 많이 못 오신다”고 한다. 아울러 현재 각 종중 대표로는 상주시의 이하정(창석 이준), 현서면의 조웅제(동계 조형도), 안덕면의 권홍기(풍애 권익), 안덕면의 조은제(방호 조준도), 안덕면의 신수용(하음 신집)으로 되어 있고 각 종중당 10만원씩 갹출해서 경비로 쓰는데 이번에 창석공 대종회에서 별도로 찬조를 해주셨다고 한다.

한편, 방호공 14대 종손 조현황 본지 발기인이자 전 군의원에 의하면 “이 모임은 방호공 모친이 1615년 현재의 신성가든 맞은편으로 이장했는데 그 이후 매년 개최되어 이제 404년째인데 내 후년에는 창석공의 고향인 상주에서 모임을 할 계획”이라 한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자 모임에 참석한 어느 한 어르신은 “선선한 곳에서 각 대표가 모여서 노름이나 한번 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농담도 하시고 어느 한 분은 “다음에 후손들이 모여 백일장 같은 것도 했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조의제씨에 의하면 “동계문집, 방호선생문집 등 선대 어르신이 남긴 고문집을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긴 하지만 청송군에서 항일의병기념공원 주변에 박물관을 지어서 청송의병장의 일기인 적원일기 등 청송 선비들의 고문서를 수집하여 함께 보관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오선동의 오선에 대해서 청송군청 조정모 재무과장이 제공한 자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창석 이준(蒼石 李埈, 본관은 흥양, 자는 숙평, 1560~1635년)

상주출신으로 남인, 조선 중기 첨지중추부사, 승지, 부제학,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조년(李兆年)의 증손.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창석집(蒼石集)이 있다.

동계 조형도(東溪 趙亨道, 본관은 함안, 자는 대이, 경달, 1567∼1637년)

청송 출신 조선 중기의 문신. 무신. 생육신 려(旅)의 5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지(址)의 아들로, 큰아버지 우(堣)에게 입양되었다. 한강문인, 경산현령, 고성현령, 가선대부, 경덕궁의 호위장, 보성군수, 경주영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동계집(東溪集)이 있다.

풍애 권익(風崖 權 翊, 본관은 안동, 자는 경보, 1572~1621년)

청송출신으로 동계의 외사촌. 조선 중기 문인, 봉정대부사재감(奉正大夫司宰監)을 역임하였다. 풍애공에 관한 문헌이 많지 않은데 가사 사정으로 고향에서 산수를 벗 삼아 학문 연마하며 철저한 유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한다. 묘소 비석에 의하면 “성품이 한가하고 자유롭고 넓으며 뛰어나고 덕이 많아 때로는 빈우(賓友)를 맞아 술을 부르고 운자를 내었으니 도의로서 교유하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여기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방호 조준도(方壺 趙遵道, 본관은 함안, 자는 경행, 1576∼1665년)

동계공의 동생으로 조선 후기 학자, 6세에 재종숙인 조개(趙介)에게 입양되었으며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형 조형도(趙亨道), 종형인 조준남(趙俊男) 등은 의병으로 나갔으나, 노친봉양 때문에 함께 나서지 못한 뜻을 시로 남겼다. 선무랑(宣武郞)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조산대부(朝散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방호집(方壺集) 5권이 있다.

하음 신집(河陰 申 楫, 본관은 평산, 자는 여섭, 1580∼1639년)

청송출신으로 조선의 문신, 의병장.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강원도사(江原都事), 충청도사, 사복시정(司僕寺正), 밀양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의례문답(儀禮問答), 관향록(管餉錄), 우복집(愚伏集), 답신여섭문목(答申汝涉問目), 하음집(河陰集) 등이 있다.

 

방호정 내부에 걸인 풍수당 현판
방호정 내부에 걸린 풍수당 현판

 

방호정(方壺亭)

조형도의 아우인 방호 조준도가 일찍 돌아가신 생모 안동권씨를 추모하기 위해 1619년에 지었으며 사친당(思親堂), 풍수당(風樹堂)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풍수당이라는 말은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으며 자식이 봉양코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옛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어머니 산소는 현재 신성가든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방호정에서 직선거리로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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