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옥이 (윤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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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옥이 (윤강 작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1.05.1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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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강(수길) 작가
윤 강(수길) 작가

 

옥이는 포교당의 늙은 살구나무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던 어느 봄날 노스님과 함께 나타났다.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작은 체구에 왕방울만 한 눈으로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는 조용하고 말 수 적은 아이였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대구 큰 절의 청심화 보살님의 먼 친척 아이인데 부모가 사고로 하늘로 가고 혈혈단신 사고무친이 되어 있던 아이를 스님들 심부름이나 하면서 밥이라도 먹게 하고 싶어서 노스님에게 맡겼다고 했다.

옥이는 포교당에 온 그날부터 예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노스님의 손과 발이 되어 여기저기를 다니며 잔심부름을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본 여러 보살들은 아이가 영민하고 눈치가 있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그렇게 포교당에 온 지 사흘이 지나 옥이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전학생이 되어 나와 같은 반이 되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부모와 살지 않고 포교당에 산다는 그것만으로 아이들은 옥이를 신기하게 생각했고 그 주변을 맴돌았다.

머리를 자르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부터 옥이는 우리가 입는 옷을 입지 않고 스님들과 같은 회색 옷을 입기 시작했다. 회색 몸빼 바지에 회색 조끼를 입거나 겨울에는 솜이 들어간 회색 누비옷을 입었다. 그렇게 옥이는 우리 학교에서 모르는 아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아이가 되었고 포교당 마당을 놀이터로 알고 지내던 나와는 더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등교는 물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올 때도 옥이는 꼭 나만 따라다녔다.

그렇게 살구꽃이 진 자리에 살구가 열리고 그 살구가 익어 옥이 눈처럼 큰 열매가 되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서 떨어질 때쯤 그 일이 있었다. 노스님이 살구나무 아래서 옥이 머리카락을 자르던 일이. “너도 승가에 발을 들였으니 이판승이 되든지 사판승이 되든지 네 그릇에 달렸다. 아직 정식 출가는 아니지만 머리를 먼저 자르는 것은 너도 납의(衲衣)를 입고 부처님 밥을 먹게 되었으니 좋은 납자(衲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무 서러워 말고 네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라” 라며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삼단 같은 옥이의 머리를 “싹둑” 하고 잘라 버렸다.

옥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구나무 아래서 조용히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흰 한지가 검은 먹물을 소리 없이 빨아들이듯 제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의식에 전념하고 있던 옥이의 눈가에 진주알 같은 눈물이 맺히더니 톡 하고 제 발등에 떨어졌다. 긴 머리카락을 자른 후 날이 살아 시퍼런 면도칼로 짧아진 머리카락을 밀어 살을 벤 칼날에서 빨간 핏방울이 떨어질 때 옥이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아파서였는지 슬퍼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치르기에는 너무나 장엄하고 무서운 의식임은 틀림없어 보였고 옥이의 아픔처럼 내 가슴도 칼날에 베인 듯 아팠다.

삭발식을 마친 옥이가 머리를 감고 포교당 뒤뜰로 들어섰을 때 나는 달려가서 옥이의 입에 입맞춤하고는 미친 듯이 달음질쳐서 뒷산으로 갔다. 숨이 차서 가슴은 터질 듯했고 줄기 끝에 핀 자색 샐비어 꽃처럼 붉고 달달한 옥이의 입술이 아른거렸다. “ 니 미친나?”며 소리치던 옥이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다.

아프고도 슬픈 삭발식 이후 옥이는 작은 읍내의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여학생들만 다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파르라니 깎은 머리로 납의를 입고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방학이 되어 시골로 오면 우리는 언제나 같이 어울렸고 슬픔의 삭발식과 첫 입맞춤은 삼베바지에 방귀 새듯 스르르 잊히고 없었다.

시골에서 여고를 졸업한 옥이는 승가대학 진학을 위해 포교당을 떠났고 나도 대학생이 된 후 자주 시골에 가지 못했다. 어느 해 겨울방학, 시골에 잠시 들렀을 때 마치 포교당에 방학을 한 옥이가 와 있었다고 했다. 큰 스님 방에서 마주한 옥이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이제는 옥이가 아니다.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정덕(情德) 스님’이라 불러야 한다.” 는 큰스님의 말씀이 맷돌의 무게로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우리 둘은 서로를 향해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날 큰스님 방에서 나온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맑은 하늘만 올려다보고 서 있다가 헤어졌다. 날이 차서인지 옥이의 볼은 석류처럼 붉었고 삭발을 한 파란 머리는 청동을 닦아 만든 거울처럼 반짝거렸다. 내 가슴은 잉걸불처럼 이글거리며 타올랐고, 달군 인두에 지진 대나무의 낙죽(烙竹)처럼 내 가슴에도 옥이에 대한 사랑인지 연민인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까맣게 새겨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남실바람에 버들잎 흔들리듯 고적운(高積雲)의 둥근 구름 조각이 흘러가듯 옥이의 소식을 들었다.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계를 받고 정식 출가를 하여 출가니(出家尼)가 되었고 공부를 잘해 인도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나도 삼귀의를 하고 오계(五戒)도 받고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하고 칼바람이 부는 법당에서 팔 걷고 연비도 했으며 정훈(正訓)이라는 법명을 받아 불자가 되었다.

그렇게 또 세월은 흘렀고 나와 옥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제 삶을 살았다. 그렇게 3년이 흘러 시골 포교당 노스님의 입적(入寂) 소식을 듣고 스님의 사십구재의 두 번째 칠일. 노스님이 입적하시고 14일이 지나 만나게 되었는데 옥이는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열반에든 노스님을 위해 경을 외우고 있었다. 옥이의 목탁 소리와 요령(搖鈴) 소리는 왕 팔랑나비의 날갯짓이 되고 때로는 구관조가 내는 사람의 말소리가 되어 절 마당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십구재가 끝나는 회향식(廻向式) 날. 내가 마지막으로 본 옥이의 모습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노스님을 위해 쓴 편지를 마음속으로 읽으면서 어깨가 들썩이도록 서럽게 울었다. 왕방울만 한 눈에서는 쉼 없이 진주 같은 눈물이 흘렀고 두 입술은 진달래를 따 먹은 봄날 아이 입술처럼 파랬다.

식이 끝나고, 보살님들과 대중들을 피해 우리는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 장독대에 나란히 앉았다. 옥이는 몹시 지쳐 보였고 아파 보였으며 슬퍼 보였다. 그런 옥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내 처치가 황망하고 미안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옥이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연꽃처럼 환하게 웃어 주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옥이의 머리에서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옥이의 삭발하기 전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유난히도 검고 빛나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언젠가 옥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버렸고 내가 여자라는 것도 잊었어. 그리고 내 팔에 연비를 새기면서 내 처녀도 버렸지. 무슨 말인지 알아?” 라며 배시시 웃던 그 모습.

처녀도 버렸다는 옥이의 말을 “평생 결혼하지 않고 비구니로 살 것이다” 로 이해한 나는 옥이가 섬뜩하리만치 무서웠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처녀를 버리고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다는 것이 대견하기보다는 너무 빨리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영혼이 경이(驚異)롭기까지 했다.

납의 속에 숨어 있던 처산(妻山)의 봉분처럼 봉긋하던 옥이의 가슴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되려는 것일까? 사랑하는 부모님을 잃고, 삼단 같던 처녀의 머리카락을 잃고, 옥이는 무엇을 얻었을까?

 

 

윤강 (수길) (尹江)

1960년 경북 청송읍 출생

2002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졸업(Ph. D)

2009년 11월 ‘대갈통 사건’으로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6년 06월 ‘버리고 버리기’ 로 지필문학 수필 등단

2018년 5월 ‘옥이’ 로 20회 민들레 문학상 수필 장려상

現.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간호조무사신문 명예기자. 한국노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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