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갑과 을(甲乙)(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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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갑과 을(甲乙)(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1.01.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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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87세)
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87세)

 

()과 을()의 관계에 대한 여러 형태의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지난날 부동산을 매매할 때 계약서에 파는 쪽은 갑이고 사는 쪽은 을로 정하여 조건을 나열하는 데 쓰였다. 한편, 요즘의 갑을 관계는 폭넓은 의미와 이데올로기를 겹쳐 혼돈이 올 때도 있다.

최근에는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상대방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권한을 남용하여 상대의 인권을 무시하고 부당한 요구나 처우로 인해 상대에게 심리적, 경제적 손실을 끼치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

이 사건을 분석해보면 수평적 상대를 수직적 상대로 강요했거나 갑을의 약정을 위반했거나 무시하고 일방적 행위를 한 강자의 소행이다.

우리의 민주적 모든 제도나 시스템이 많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분야에 따라 명암의 요철이 매우 심하다.

한 예로 국회를 통과한 “중대재해 처벌법”을 들여다보자. 어떤 신문 만화에서 기업인들이 웃고 있다.

어느 기업이 이 법을 겁내고 조심하겠나?

이 법 제정의 목적은 노동자가 일하다가 죽지 않게 하자는 것인데 노동자가 반겨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기업의 갑질이 그치지 않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가늠자는 숙의 민주주의이다. 우리는 수차의 숙의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한 바 있다.

갑을 관계가 자주 언론에 오르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우리가 인권존중과 수평 관계 정착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사회적 발전, 즉 민주적 사회로 진일보하는 과정으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윤리적 갑을 관계는 안타깝게도 패륜적인 현상으로 가고 있다.

젊은 세대가 노령세대에 대하여 예우하고 보살펴주는 것이 사회적 동물의 정도인 이유는 그 젊은이도 세월이 가면 노쇠하여서 노인에게 갑질 하는 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짓밟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 어버이와 자식 간의 갑을 관계는 사랑이란 윤리적 가교가 있기에 영원한 갑이고 을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박식하고 학문적 섭렵이 깊다고 해도 제자가 갑이 될 수 없다. 사제간에 학문적 논쟁이나 토론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갑을 위치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등록금 납부 일자 며칠 남지 않았다고 울상으로 애원한다.

아버지의 고민이 깊어간다.

70년대 우리 농촌에서 대학을 보내자면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 온 가족의 근검절약 없이는 될 수 없다.

직장에 자리 잡고 결혼하고 손자가 무럭무럭 자랄 때쯤 아버지는 노동력도 경제력도 떨어졌지만, 아이들의 바쁜 사회활동, 볼 때마다 성장한 자신의 분신이 대견스러워 고달팠던 지난날은 잊게 된다.

그 시간도 잠깐, 눈도 귀도 팔다리도 병원신세를 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건망증에다 시시로 엉뚱한 저지레를 한다. 치매 같은 현상도 온다.

아버지 앞에서 등록금의 다급성을 애타게 설명한 아들이 노쇠한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의 현 상황을 알아내어 최선의 대처를 하겠다고 애태우는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은 영원한 을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아들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버지가 노쇠하면 을의 위치로 돌아간다.

예로부터 효 불효가 있었던 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히 갑을 관계를 지속하는 자는 효자가 되고 아버지가 노쇠했을 때 갑과 을이 바뀌는 아들은 불효가 되는 것이다.

갑을 관계의 갑과 을이 여러 의미로 풀이되고 있는 것은 한자에서 한자가 여러 의미와 음을 달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권과 수평으로 보는 갑을관계, 거래조건에서 갑을관계, 윤리적인 면에서 보는 갑을관계 모두 그 이슈의 방향은 너무나 다르다.

인권과 수평은 민주주의 발전에 한 분야를 발전시키고 있지만, 윤리적 갑을 관계는 가족공동체의 온기를 소멸시키고 있다.

포용적 복지정책이 시급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젊은이가 헬조선 하듯이 노령층은 을이 된 처지가 슬퍼 지옥 열차에 앞다투어 탑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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