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신성계곡 물길 따라 (박월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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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신성계곡 물길 따라 (박월수 작가)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0.11.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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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월수 작가

 

봄 산빛이 환합니다. 청송 골짜기에는 이제 막 사과꽃이 벙글기 시작합니다. 이맘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사과꽃 안부를 묻는 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꽃이 마이 왔니껴”

제가 들어본 말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사입니다. 저는 이 고운 말이 어디로 날아갈까 두려워 두 손으로 여미듯 해서 장롱 깊숙이 넣어두고 싶어집니다. 꽃의 안부를 묻는다는 건 가을에 올 결실을 미리 점쳐보는 것이지요. 한 편으론 이제 곧 본격적인 일 철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축원과 삶의 의지를 꽃 인사로 에둘러 표현한 이 고장 사람들이 제 눈에는 모두 시인으로 보입니다. 꽃의 안부를 묻는 꽃 같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섞여 있다는 일이 저에겐 축복입니다. 그래 저는 꽃을 피우기 위한 나무의 노고를 언제든 기억하려 애씁니다.

봄볕을 핑계 삼아 오늘은 봄나들이에 나섭니다. 과수원 땡볕 아래서 사과 알갱이를 솎아내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과수원지기인 저에게 미리 건네는 봄 선물입니다. 청송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는데 그 몫을 단단히 한 신성계곡으로 향합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요. 40여 리에 이르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 피기 시작한 눈부신 사과꽃뿐 아니라 온갖 모양의 현란한 지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청송 팔경 중에서도 제 일경에 속하는 이 계곡엔 뛰어난 볼거리가 풍성합니다.

물 맑기로 소문난 길안천 상류에 속하는 계곡은 천문대가 있는 보현산이 그 시원입니다. 어쩌면 가는 길에 계곡물에 몸 헹구는 낮별을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찰방찰방 물장구치며 놀던 수달이 물에 빠져 노는 낮별을 건지느라 몸 놀리는 걸 보는 일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일 것 같습니다.

계곡 초입에 들어서면 높은 벼랑 위에 아담한 정자 하나가 반깁니다. 신성계곡의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지요. 조선시대 선비 조준도가 어머니를 그리며 세운 ‘방호정’입니다. 어머니의 묘가 바라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는데요.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한 그가 후학을 기르며 학문을 논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느껴지는 나뭇결 문틈으로 가만히 귀를 대어보니 옛 선비의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들릴 듯합니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벼랑은 백악기 시대의 지질이 층층이 쌓여있어 ‘방호정 퇴적층’이라 불린다지요. 백악기의 단면을 축적해 놓은 내밀한 지질 보고서인 셈이지요. 주변 숲을 배경으로 계곡 물속에도 소박한 정자 하나가 또 그렇듯 들어앉았습니다. 흐르는 물에도 젖지 않을 고고한 풍경입니다. 빛바랜 정자에서 풍기는 사모의 정이 이 골짜기를 더욱 기품 있게 합니다.

방호정을 둘러본 후 다시 계곡을 따라 길을 나서면 산을 임의로 깎아 놓은 듯 기울어진 암반이 보입니다. 공룡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곳이지요. 일억 년 가까이 묻혀있던 짐승의 발자국을 태풍 ‘매미’가 지나며 꺼내 놓고 갔습니다. 침묵하고 있던 지구의 한 귀퉁이를 깨우고 간 거대한 매미에게 잠시 묵례라도 하고 싶어집니다. 지구별이 새겨 놓은 서사시를 감상하듯 경사면 위를 올려다봅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걸어간 짐승의 흔적이 무려 수백 개입니다. 백악기 마지막을 살았다는 공룡의 발자국을 마주 보며 경사면에 설치된 탐방로를 따라 걷습니다.

일억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난 화석에서 거대한 공룡의 날갯짓을 떠올립니다. 과거로부터 불어온 세찬 바람이 휘몰아칠 것아 순간 몸을 웅크립니다. 오래전 넓은 평지와 호수였다던 이곳은 어쩌면 덩치 큰 짐승들의 놀이터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 중 가장 넓게 분포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백악기 공룡의 마지막 낙원이었을지 모를 이 골짜기를 시샘하였을까요. 하늘과 땅은 서로 내통하여 깊숙이 숨겨버렸으니 말입니다. 커다란 짐승의 발자국 곁에 가만히 내 발을 견주어 보는 상상을 합니다. 겨드랑이 어디쯤에서 생기다 만 날개가 돋을 것도 같습니다.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전망대 끝에 이릅니다. 저는 조금씩 친근해지기 시작한 그들의 발자국과 천천히 작별합니다.

다시 길을 떠납니다. 천지에 사과꽃 향기 퍼지는 햇살 좋은 봄날입니다. 이 지방의 봄은 다른 곳보다는 몇 발자국 더디게 찾아듭니다. 깊고 높은 곳에 자리한 골짜기는 늦게 만난 봄을 더 오래까지 함께 합니다. 나부끼는 바람이 살갗을 간지럽히고 계곡물소리는 감미롭습니다. 그 물아래 이 지방 사람들이 골부리라 일컫는 ‘다슬기’ 커 가는 소리 들릴 것 같습니다. 어린 다슬기는 물속에서 자라는 반딧불이 유충을 먹여 살리겠지요. 외진 이 골짜기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꿈결 같은 여름을 미리 그려봅니다. 드문드문 지나는 차들은 낙원을 찾아가는 방랑자처럼 급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이곳에만 존재하는 듯 저는 봄 다 가도록 이 계곡을 걸을 것만 같습니다.

좀 더 나아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진 계곡에 엎어질 듯 우뚝 선 붉은 절벽과 마주합니다. 지소리의 ‘만암자암 단애’입니다. 이곳 사람들이 ‘붉은 덤’이라 부르는 곳이지요. 사진가들에겐 ‘적벽’이라 소문난 이곳은 비 내리는 날 바라보면 더욱 붉게 보여서 초록의 숲과 대조를 이룹니다. 저는 그 모습이 좋아 부러 흐린 날을 택해 이곳을 찾기도 합니다. 수직으로 뻗은 붉은빛의 절리가 인상적인 이 구간은 목적을 지닌 탐방객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는 곳입니다. 이국적인 정취마저 묻어나는 이곳은 선경이라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쁠 일 하나 없는 저는 붉은 덤 아래에 놓인 징검다리를 느릿느릿 건너봅니다. 아주 오래전 술병을 들고 물속에 뜬 달을 건지러 간 이백은 아니어도 지난밤 하늘에 마실 나왔다 사라진 별의 안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나친 기대였을까요. 반짝이며 흐르는 물에 사과 꽃잎 서넛 흘러갑니다. 산언저리 과수원마다 길 잃은 별이 매달린 듯 사과꽃 소담하더니 여기까지 그 은은한 향기 나눠준 모양입니다. 겨우내 목축인 나무가 계곡물에 띄우는 연서처럼 보입니다. 저도 이 봄 다 지나기 전 저토록 아름다운 꽃잎 편지를 띄워보고 싶어집니다.

숭배하고픈 풍경을 뒤로하고 또다시 길을 걷습니다. 계곡 양옆으로 튀밥 같이 부푼 사과꽃 다 지고 나면 가로에 길게 늘어선 산딸나무에 하얀 바람개비 같은 꽃이 피어 이 길을 몽환 속으로 이끌 것입니다. 꽃이 피는 일을 생각하면 꽃 피우기 위해 물어뜯긴 나무의 상처가 떠오릅니다. 그 상처 위로 열매가 되어선 안 될 꽃을 솎아내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의 바쁜 일손 아래 버려진 꽃들은 차곡차곡 쌓입니다. 저렇듯 버려진 꽃들도 땅속으로 가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화석이 되면 좋겠습니다. 먼 훗날 또 한 번 지구가 꿈틀대는 날, 다시 깨어날 수 있다면 우리가 살던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게 기억될까요.

어느 사이 고와 마을에 왔습니다. ‘백석탄’이 있는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청송의 지질공원에는 총 17개의 지질명소가 있는데요. 국립공원 주왕산을 중심으로 한 ‘주왕산지구’와 백석탄을 품고 있는 ‘신성지구’입니다. 이곳 신성지구 중에서도 ‘하얀 돌이 반짝이는 여울’이란 뜻을 가진 백석탄을 저는 가장 편애합니다. 풍경을 사랑한다는 건 직접 보는 것을 넘어 보듬고 안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으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다는 주왕산 주변에 널린 특이한 지질 공원보다 사람의 손길을 허락하는 이곳을 저는 오매불망 그립니다. 주말 새벽이면 출사 나온 사진가들로 붐비는 이곳을 저는 짬만 나면 찾아와선 쓰다듬어 보곤 합니다.

상처에서 꽃이 핀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석탄에 있는 흰 바위는 모두가 억겁 상처의 기록입니다. 흉터를 지닌 바위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흐르는 물에 씻겨 하얗게 바랜 채 널린 돌의 모서리는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합니다. 거친 물살과 바람에 시달린 바위의 형상은 신들의 조각품을 연상케 합니다. 포트홀이라 불리는 돌개구멍에 고인 물을 보며 그들 상처의 세월이 저만큼인 걸 알겠습니다. 삶이라는 걸림돌에 수시로 발부리가 걸려 넘어져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고도 남을 깊이입니다.

옛 시인은 백석탄을 주왕산 가까이에 자리했더라면 금강산에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라고 칭송했다지요. 저는 오랜 연인에게 그러하듯 바위 하나를 힘껏 껴안아 봅니다. 처음 생겨났을 때의 따뜻한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착각마저 듭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난 이들에겐 지구의 역사가 한데 엉겨있을 터입니다. 인류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들은 생겨나고 이곳에 존재했습니다. 강가의 돌멩이 하나에도 우주의 전 과정이 녹아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저는 서로 다른 백석의 표정을 살핍니다.

소용돌이 속에서 거품과 씨름했을 바위의 촉수가 저에게 말 건넵니다. 시새우는 바람과 물살에 제 몸 한 귀퉁이 내어주는 법을 알아야 견딜 수 있는 거라고요. 문신처럼 새겨진 실금과 유려한 곡선들이 속삭입니다. 소멸되지 않으려면 제 몸에 난 흉터를 핥으며 스스로 치유하는 도리밖엔 길이 없다고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세찬 물살에 잘근잘근 씹히고 더러는 뿌리째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제자리를 지켜온 끈기가 눈물겹습니다.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고 역사는 그렇게 이어지는 거라고 백석탄은 저에게 조곤조곤 일러줍니다.

처음 그에게 다가와 눈을 맞추었던 우리들의 조상, 그들의 숨결이 아직도 새어 나오는 건 아닌지 귀를 기울입니다. 반짝이는 여울 속에 하얀 바위는 침묵으로만 일관합니다. 지친 길손의 목을 축여주고 다리 뻗고 누울 수 있는 든든한 쉼터도 되었을 너럭바위에 잠시 걸터앉아 봅니다. 힘든 일을 마치고 물가에 앉아 호미를 씻던 농부의 얼굴이 스칩니다, 가사연(歌詞淵)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찍힌 바위 곁에서 갓 쓴 선비들이 도포 자락을 펼치고 앉아 시를 읊던 모습이 그윽이 생각 키웁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머물던 바위에 제가 기대어 있다 생각하니 수만 세기가 한꺼번에 제 곁에 머문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고르게 퍼졌던 햇빛이 산 그림자에 가려 흔적도 없습니다. 봄날은 언제나 서러우리만치 짧습니다. 반짝이던 여울엔 낮 별도 잠들었는지 적요함이 묻어납니다. 잡목 숲을 잘라먹은 어둠이 소쩍새 울음에 실려 계곡으로 내려오고 하얀 바위는 제가 지닌 몸빛으로 하여 일몰과 달밤의 경계를 흐려놓습니다. 모호한 경계는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억 년 제자리를 지켜온 백석의 의지가 어둠마저 무색게 할 것 같은 힘의 상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각시붓꽃 한 포기 밝은 어둠 아래 서성대다 보랏빛 입술을 오므립니다. 은은하게 번지던 사과꽃 향기도 하루 일을 마친 꿀벌들이 떠났는지 더는 맡을 수 없습니다. 신성계곡 물길 따라 함께한 봄날은 이렇게 저뭅니다. 풍경은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래 매만져 마음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 문을 열고 빛바랜 방호 정자와 움푹한 공룡발자국과 병풍 같은 붉은 덤을 눌러 담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얗게 반짝이며 모양을 바꿔 갈 백석탄의 절경도 꾹꾹 챙겨 넣습니다. 오늘 본 시간의 풍경을 저만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를 알고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리길 소망해 봅니다.

 

박월수(1966년생) 작가는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로 등단하였으며 현재 청송 문인협회 부회장, 청송 시를 읽자회원으로 청송군 현동면 인지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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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혁목 2020-11-29 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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