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심종록 시인의 詩詩한 세상 읽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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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심종록 시인의 詩詩한 세상 읽기 2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0.06.08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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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 웃고 우는 대동세상을 꿈꾸며 -

선묵(禪墨)이라 불리는 그림과 글이 있다. 많은 선지식과 선승들이 수행 중에 돈오(頓悟)의 한순간을 방편으로 나타낸 글과 그림이다. 그런 글과 그림을 선화(禪畵) 또는 선서화(禪書畵)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석정 스님이다. 사바세계에 무량한 부처님과 불보살이 존재하듯 깨달음의 방편도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개중 알려진 선화 하나를 꼽는다면 17세기 초 일본까지 이름을 떨친 조선 중기의 화가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達摩圖)를 들 수 있다.

김명국은 1636년 무렵 조선 통신사행의 일행으로 일본에 건너가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거칠 것 없는 대담한 필체로 단순하게 그려낸 이 보리 달마도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선종화(禪宗畵)로 손꼽힌다. 한편 선서(禪書)로는 충남 공주 출신의 일타(日陀) 스님의 작품인 <忍>을 들 수 있다. 일타스님은 외가와 친가를 비롯하여 일가족 41명이 모두 출가한 것도 모자라 중노릇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고 엄지를 뺀 오른쪽 손가락 네 개에 불을 붙여 밤을 새우고 아침이 환하도록 부처님께 공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타스님의 선서 <忍>

 

글씨가 마치 삿된 생각을 끊어 내거나 마귀를 쳐부수기 위해 칼날을 휘두르는 사천왕처럼 힘차면서도 자유자재하다. 한바탕 춤사위를 보는 것도 같다. 忍(참는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힘든 실천적 수행이자 내부의 마를 퇴치하기 위한 공격적인 행동이 아닐까.

그리고 최근에는 성묵화(性墨畫)라는 장르가 새로 등장했다. 성묵화라는 호칭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 사람은 동양화가 유준이다.

 

 

얼마 전 유준은 인사동 화랑에서 ‘성묵화’라는 타이틀을 걸고 성대하고도 센세이셔널하게 전시회를 열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나 근엄 주의자들이 보기엔 대단히 불쾌하도록 도발적이고 해괴망측했으리라.

유준 화가의 보살도. 나는 오래전에 이 그럼에다 이런 글을 덧붙여서 그의 전시회를 축하해주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황소바람이 찢어진 문풍지 사이로 쳐들어오는 엄동설한이었나. 아니면 철쭉이 붉고 야밤의 뻐꾸기 소리 심사를 어지럽히는 춘정 가득한 봄밤이었나. 희미한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 삼매에 들었던 사내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밖으로 나선다. 뜻밖에도 금방이라도 산달이 닥칠 것처럼 배가 부른 여인이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한다. 먼 길을 오래도록 걸어온 탓인지 남루하고 피곤에 찌든 몰골이지만 여인의 체취를 맡는 순간 물리쳤노라 자부했던 음심이 꿈틀 일어선다. ‘저건 나의 오달(悟達)을 방해하기 위한 악마의 분신이다.’ 사내는 이를 악물며 단전에 힘을 준다. “썩 물러가시오. 이곳은 악마가 범접치 못하는 청정도량이오.” 사내는 붓다의 말을 되뇌며 여인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오래전 붓다는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에게 경고했다. 설령 독사의 아가리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여성의 음부에 그것을 넣지 말라고.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 넣을지언정 여성의 음부에는 결코 남근을 집어넣지 말라고. 사내는 그 계율을 주문처럼 외우며 여인을 문밖에 세워둔 채 냉정하게 문을 닫아걸려다가 멈칫한다. 일체가 공한 것인데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악이고 또 선인가. 만유 제법이고 본래무일물인 것을.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자아를 죽이고…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도 지극한 보살행이 아닌가. 사내는 만삭의 여인을 안으로 들인다. 그날 밤 산기를 느낀 여인이 사내에게 또다시 도움을 요청한다. 사내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분만한 여인이 이번에는 목욕물을 부탁한다. 여인이 몸을 담그는 순간 목욕물이 향기 가득한 황금 물로 변하고, 여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사내에게 금물에 몸을 담그라고 말한다. 자신은 관세음보살로 사내의 깨달음을 성취시켜주기 위해 현신한 것이라며. 노힐부득(努肸夫得)이 만삭의 여인으로 현신한 관세음보살의 유혹에 빠져 성불에 이르는 이야기다.

 

유혹이 없는 세상이 존재할까. 사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는 그런 세상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유혹이 없는, 욕망이 부재한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다. 욕망이 있어 사람이고 유혹이 있기 때문에 매혹적인 세상을 살아간다. 돈이, 권력이, 명예가, 삶이, 슬픔이, 기쁨이, 성과 죽음이 때로 요구한다. 자기들을 존중하고 공경해달라고. 그들의 유혹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일부러 져주기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더없는 보살도를 행하는 일이니까. 남녀일근(男女一根)의 보리열반(菩提涅槃)에 드는 일이니까.

‘독사의 아가리나 타오르는 불 속에 집어넣을망정 여인의 그곳에는 결코 남근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계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성문이나 연각 수준의 구도자라면 분명 주화입마에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그토록 서슬 푸른 납자가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지만.

견성(見成)이나 오달(五達)했다는 것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일 터. 그 지경에 선악이나 미추의 구분이 있겠는가. 설사 그 경지에 이르진 못했더라도 강 건너 저쪽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여섯 가지 방법(六波羅密, 六度)의 첫째는 베푸는 것(報施)이라 했거니와, 그 발단은 동정과 연민일 것이 분명하고, 동정과 연민 속에서도 좋고 나쁨을 구분한다면 그건 분명 또 다른 차별이고 편견이 아니겠는가.

편견 없는 대동세상을 꿈꾸는 것은 분명 미친 짓이겠지만, 그래, 그렇게 미쳐서 한 세상 살아가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다 생각해보는 봄날이다.

 

문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공간은 어디로 사라졌나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가까이 오고 하늘과 땅엔 빛이 넘치는구나

 

1956년 3월 어느 날 일타스님이 큰 깨우침을 얻은 후 남긴 글이다.

 

 

심종록 시인

경남 거제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모리티우스를 찾아서』

시집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

시집 『쾌락의 분신 자살자들』

전자시집 『빛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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