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수필) - 팔순잔치 (신동호 제주시 신제주와이즈만 영재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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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수필) - 팔순잔치 (신동호 제주시 신제주와이즈만 영재교육원 강사)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0.05.08 07:34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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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핸드폰으로 사진이 한 장 들어왔다. 장구를 앞에 두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분당에 살고 계시는 친구의 어머니였다. 바로 전화를 드렸는데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스친다. 지금 내가 육지에 있으면 바로 달려갈 텐데, 제주도라 당장 달려갈 수가 없다. 서울, 인천, 수원 쪽 사는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린다. 빨리 효준 엄마네 집에 가보라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내일 아침까지 연락이 안 되면 찾아가 본다고 한다.

친구 엄마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 고생 끝에 키운 큰아들은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프로 농구 감독을 하다가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전자 슈터 김현준 어머님이시다. 둘째 아들이자 막내인 효준이는 나와 고등학교 3년을 같은 반에서 동고동락한 친구이다. 효준이 집이 학교 근처였기 때문에 우리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우리 친구들보다 사는 게 나았던 효준네 집은 우리들의 배고픔을 잊게 해 주었고 또한 우리들의 공부방이었다. 여기서 공부한 친구들이 모두 상위권에 포진할 정도였다. 특히 어머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시는 만두는 그 어떤 맛 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지금도 잊지 못할 맛이었다. 어머님은 우리 친구들을 다 ‘아들, 아들’ 하면서 살갑게 대해주셨다. 지하에 방을 꾸며 주셔서 시험 때나 집이 먼 친구들의 숙소처럼 쓰였다. 또한, 현준 형은 우리에게 우상이자 친구들의 자랑거리였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형의 경기를 응원하러 다녔다. 우리에게는 이충희, 허재가 최고 스타가 아니었다. 오로지 김현준이었다. 우리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현준이 형과 포장마차에서 소주도 한잔했다. 전화도 없이 현준형 집에 쳐들어가서 형수님과도 밤새워 깔깔거리며 놀기도 하였다.

현준이 형이 돌아가시고 친구 효준이는 결혼을 하려고 소개팅도 하고 했는데 첫 번째 효준이의 머릿속은 부모님을 결혼 후에도 모신다는 생각뿐이었다. 친구와 나는 군대도 비슷한 곳에서 근무하였다. 나는 육군 항공(헬리콥터) 정비부대, 친구는 육군 항공(헬리콥터) 공수부대 지원부대로 내무반은 같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주말에는 같은 영내에 있는 휴게실에서 나는 선임으로 친구는 졸병으로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하였다. 처음으로 차도 같은 시기에 사게 되어 강원도로 부부동반 여행을 자주 다녔다. 미시령 고개에서 폭설을 만나 하루를 오도 가도 못하고 물 한 병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찬란한 신혼을 설계하며 두 부부의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곤 하였다.

세월이 흐른 후 동창모임에서 효준이가 나를 따로 불러서 담배 한 대만 피워보자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던 친구인데, 나한테 물었다. 혼자 사는 게 어떠냐고. 사실 나는 혼자 산 지 오래되어 이제 누구랑 사는 게 더 힘들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성격 맞추고 투닥거리는 것보다 지금까지 인연들과 행복하게 내 멋대로 살고 싶다. 대충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만 뿜어댔다.

잠시 후 효준은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몇 년 전 돌아가시고 어머님 혼자 사신다고, 어머님이 사는 조그만 아파트를 은행에서 주택담보 대출을 해서 그 돈으로 사시도록 지난달에 신청해 놓았다고, 친구 머릿속은 오직 어머니였다. 다음 주에 회사 일로 페루에 수자원 댐 건설을 하기 위해 헬리콥터 시찰을 간다고, 페루 다녀오면 회사 임원 될 거라고 좋아하기도 했다, 우리는 잠시 군대 이야기를 했지만, 홀로 남게 된 어머님으로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이다.

어느 날 깊은 잠을 자고 있는데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TV 뉴스에 페루에서 헬기가 추락했는데 농구선수 김현준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그 속에 효준이가 있었다. 나는 열흘 후 영종도 화물터미널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에서 생방송이 되는 가운데 친구를 장례식장으로 운구하였다. 키 180미터에 90킬로인 친구는 너무 가벼워져 돌아왔다. 장례를 치르고 어머님에게 전화도 드리지 못했다. 두 아들을 한 회사에서 다 잃어버린, 소설로도 쓸 수 없는 기막힌 일이다.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도 어떤 몸짓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우리는 친구가 죽은 날을 정확히 알지 못해 6월 6일을 기일로 삼아 매년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 어머님께서 내게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보내 주신 것이다. 전화를 백번도 더 드린 거 같다. 새벽에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겁이 난다. 수원 친구가 어머님을 만난 걸까. 어머님께서 혹시? 하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다행히 어머님 전화이시다. ‘아들, 전화 많이 했네.’ 하시면서 오히려 심장 아픈 거 어때? 하고 나한테 먼저 안부를 물으신다.

“어머님, 사진 너무 예쁘세요!”

“경로당에서 스마트폰 사진 주고받는 거 배웠는데 내가 너 말고 어디 보낼 때가 있느냐?”

어머님 말 끝에 울음이 섞여 들었다. 경로당에서 거짓말을 하셨단다. 5월이 되면 자식들이 해외여행을 보내준다면서 서로 자식 자랑으로 떠들썩해서, 자식 없는 사람은 왕따 당하는 느낌이어서, 당신도 제주도에 아들이 있다고 하셨단다.

마침 누이가 다음 주에 제주도를 온다고 한다. 그 참에 효준 어머님의 비행기 표를 예약해놓고 누이에게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와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제주공항, 어머님과 누이의 모습이 보인다. 이 멀리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오시는 어머님을 뵈면 내가 울까 봐 신경안정제까지 먹었다. 잊고 살았던 기도가 나온다. 하느님, 어머님이 나를 효준이로 잠시라도 보이게 해 주세요.

효준이 어머님께서 제주에 가신다고 아는 육지 친구들이 내게 효준이 엄마 뭐라도 해 드리라고 돈을 보내주었다. 마침 제주에 친구들이 몇 있어서 어머님에게 옷을 사드리고 누이는 미역국에 요리를 하고 친구들은 케이크를 사 오고 어머님의 팔순잔치를 준비하였다. 어머님의 어두운 표정의 웃음에도 잠시 미소가 감돌고, 어머님의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케이크의 촛불은 꺼지고 울음 섞인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신동호 원장 약력

 

경북 문경 출생 (1963년생)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자원공학과

입시학원 원장 및 수학강사

현 신제주와이즈만 영재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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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2020-05-08 20:57:05
동호형의 팔순잔치
에세이스트 91호에 게재되었고 이글로 신인작가상을 수상한걸로 알고있습니다
이 글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읽었을때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우리가 알 수 있겠네마는, 동호형의 마음 씀씀이가 감동되어 눈물로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psscjb 2020-05-08 20:18:15
정말 감동을 주네요
울컥해요 어머니 생각이나

이성은 2020-05-08 20:20:05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가면,..,. 불효라던데~~~...,.., ㅠㅠ 젊은 아들,,,둘을,,,잃으신.,,,,.어머님의, 마음과 작가분과 돌아가신 친구분과의 우정 ~~~ 찡~~~~하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 잘 읽고 가요 ~~~ *^^*

김유휘 2020-05-08 20:34:06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좋은 글이네요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실천하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양권우 2020-05-08 20:48:17
정말 감동을 주는 수필이네요~
마음에 오래 남을꺼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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