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의견) - 패착(敗着)(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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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의견) - 패착(敗着)(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 청송군민신문
  • 승인 2020.01.0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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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배용진 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

 

인생은 실패의 점철이다.

어떤 학자의 칼럼에서 읽었다.

성공보다 실패에는 상대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실패는 깊게 각인되고 외부로부터 무형의 압박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패만 줄줄이 연결되어 성공을 덮어버리는 의미로 보고 싶다.

실패의 출발점이 바로 패착이다. 인생은 실패의 점철이면 또한 패착의 점철이 될 수 있다.

명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여파가 크고 울림도 커진다.

암울했던 시절 젊은이 가슴에 정의의 불을 붙인 젊은이의 아이콘 시인 김지하가 박근혜를 지지 선언하는 패착을 놓았다.

그 패착이 그의 인생 모두를 덮고 지나갔다.

정치권에 거물급 인사의 패착은 젊은 후발 세대에 가치관 형성과 정의감에 큰 혼선을 주는 잘못을 남겼다.

젊은 시절 진보적 행동과 사고에 많은 후배가 의지했고 존경과 신뢰를 받았던 그들이 정치권의 수혈이란 명분에 보수적인 삶으로 말을 갈아탔다.

자신들의 입신영달을 위해 극우적인 언동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패착은 정치판에서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비운의 종착지에 가고 있다.

보수는 불량하고 진보는 건강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접목이 아니고 줄기 번식이란 역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자유당이 친일청산을 막고, 역으로 친일인사를 기용하여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란 덫을 놓아 감옥에 보냈다.

그 후 두 번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민주시민을 학살한 후신이 우리가 말하는 보수다.

우리의 보수는 뿌리에 대한 반성이나 참회와는 거리가 멀다.

가까운 사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죄가 없고 정치적 보복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새가 하늘에서 자유롭고 힘차게 비상하자면 두 날개가 건강해야 하는데 한쪽이 건강하지 않으니 멋있는 비상은 볼 수가 없다.

우리의 진보가 건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대적인 처지에서 보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지도자의 패착은 역사 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로 인한 국민의 고통은 분열과 갈등을 양산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 모두가 패착이다.

소모적인 갈등, 수십조의 예산낭비 이 또한 패착이 주는 산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IT 사업의 성공 <김대중 어록 : 산업화는 우리가 일본에 밀렸지만, IT 산업에서 일본에 질 이유가 없다.> 은 미완이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균형발전 정책은 승착(勝着)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청송의 사례를 보면 지난 군정에서 승착보다 패착이 더 많다.

상습적 수해지역에 하천 폭을 넓힌 사업은 승착이다.

하천에 야외수영장은 패착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패착과 동행한다. 사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투명하지 못한 곳을 넘겨보는 지족(知足) 하지 못하는 일, 그 유혹에 귀를 주는 일, 그 인생의 파멸과 연결된다.

여기에 소인도 대인도 없다. 우리의 윤리를 그리워하는 세대, 자본주의에 몰입한 세대가 너무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서로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사회는 패착의 산물을 정리하기 위한 제도와 법을 계속 만들어 간다.

법이 많은 나라는 살기 힘들고 행복지수가 낮은 나라로 간다.

우리는 패착의 소굴에서 승착이 씨름하는 형국이다.

지도자의 패착은 자신보다 대중에게 고통을 주고 크게는 역사발전을 가로막기 때문에 바둑알 한 개를 놓을 때 여러분의 훈수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 아(我)와 비아(非我)가 없다.

우리는 지금 아(我)는 있고 비아(非我)가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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